15일 밤 쿠퍼티노 플린트센터 공연
1. 깊은 밤, 차를 달리다.
그 남자들의 음성은 매혹적이었고, 화음은 장대했다.
7월 15일 일요일 밤, 원근각처에서 차를 달려, 쿠퍼티노 디 안자 칼리지플린트 센터(Flint Center in De Anza College)를 메운 관객은 이 천여를 상회했다. 금쪽 같아서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주말, 그것도 내일이면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마냥 느긋하게 자리를 보존하고만 싶은 일요일 밤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홀은 가득찼고, 관객들은 소풍을 앞둔 아이들처럼 마냥 들떠 있었다.
그랬다. 그날밤, 그들의 가슴 속엔 무언가를 향한 강렬한 갈망, 타는 목마름이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했던 타향살이의 향수와 애환이라 불러도 좋을 그 목마름을 가슴 가득 안은 관객들은 쏠리스트 앙상블이 만들어낼 지고한 화음을 통해 해갈(解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객석은 흥분으로 인해 기분좋은 술렁임으로 들떠 있었다. 관객들은 설레이는 가슴을 지긋이 누르며 오랜만에 조우한 일가친척,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공연을 기다렸다.
예의 그 또박또박한 칼발음의 소유자인 사회자 차인태 씨가 등장하고, 성악가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자 장내는 또 다른 열기에 휩싸였다. 한 사람의 명성만으로도 가득 차고 남을 무대가 오십여명의 쏠리스트들이 발산하는 커다란 아우라로 넘쳐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말한다. 그 남자들의 음성은 여름밤의 장미향만큼이나 매혹적이었다고.
총 3부로 나뉘어 진행된 공연은 20 여년 간 갈고 닦여진 연륜이 밑받침되어 시종일관 안정된 무대와 세련된 매너를 유지하며 진행되었다.
2. 한계령, 그 인생의 고개에 대하여
‘성조기여 영원하라’와 ‘애국가’를 필두로 시작된 1부에서는 ‘내가 참 의지하는 예수’, ‘주의 크신 은혜’, ‘성자들의 행진’ 같은 잘 알려진 흑인 영가들이 연주되었다. 한양대 박수길 교수 이하 바리톤들과 계명대 김원경 명예교수 이하 베이스들의 중후한 울림이 돋보이는 연주였다.
2부에서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나부코)’, ‘귀족들의 합창(리골레토)’, ‘병사들의 합창(파우스트)’ 등과 같이 대중적인 대합창곡과 ‘살짜기 옵서예’, ‘산골짜기의 눈마저 녹는데’, ‘영광의 탈출’ 등의 뮤지컬 곡을 연주해 남성 합창단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웅장한 화음을 선사했다.
그러나, 나는 3부, 그것도 ‘한계령’에 대해 꼭 이야기하고 싶다.
쏠리스트 앙상블과 함께 한 로비에서의 이색적인 인터미션이 끝나고, 관객들은 또 다른 설레임으로 그들의 연주를 기다렸다.
‘얼굴’로 시작된 3부는 ‘동심초’에 이어 ‘한계령’에 이르고 있었고, 관객들은 하나같이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가슴 저 깊은 곳으로 잔잔히 흘러들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 거역할 수 없는 감동과 정서의 홍수 속에서 베이스 김원경 교수의 ‘한계령’은 관객들의 마음을 일시에 무장해제시키고 저마다의 한계령으로 이끌었다.
그 밤의 ‘한계령’ 속에는 생의 무게와 삶의 손때와 한숨과 탄식, 그리고 연주가의 연륜이 베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그저 노래 ‘한계령’이 아니라 인생의 한계령을 상징하는 하나의 대하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되어 관객의 가슴을 쳤다.
3. 노래 속에는 꼭꼭 숨은 인생--음악과 인생에 대한 단상
내가 좋아하는 가요가 꼭 세 곡 있으니, ‘한계령’과 ‘북한강에서’ 그리고, ‘서른 즈음에’가 그것들이다.
나의, 아니 우리의 대학시절은 참으로 불우했다. 이한열이 죽고, 박종철이 죽고, 학교는 언제나 휴강 상태였으며, 친구들은 학교가 아니라 명동성당이나 남대문 등지로 등교아닌 등교를 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학교와 강의실을 빼앗기고 어린 나이에 홀로 지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한 사회와 괴물같은 세상을 어깨에 짊어지느라 젊은날을 송두리째 반납해 버리고 말았다.
사사로이 인생을 고민하거나 생에 대해 의문을 던져 볼 여유도 시간도 없이 그렇게 청춘을 보내야 하던 내 가슴은 말 그대로 찬바람 부는 허허 벌판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한계령’이 있었다. 못난 가슴이 허허로울 때마다, 괴물같이 버티고 선 삶이 버거워 질 때마다, 그리고 불가해한 생(生) 앞에 주눅이 들 때마다 나는 웅얼웅얼 예의 그 ‘한계령’을 불러 보는 것이었다. 누가 들을까봐 무척 조심하면서, 천자문 외듯 그저 웅얼웅얼, 말이다.
그때가 내 생의 한계령이요, ‘한계령’이라는 노래가 내 삶의 모든 장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어찌 그것이 나만의 정서이겠는가. 그것은 모든 40대들의 정서이자,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어른들의 지나간 아픔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모두 가슴 속 깊은 어딘가에, 삶의 어느 순간 발견해 버린 한계령, ‘내려가라, 내려가라’하고, ‘잊으라, 잊으라’ 등 두드리는 한계령을 하나쯤 품고 살지 않는가.
그리고 20년이 지난 어느날, 은사의 칠순 기념식이 끝난 후 노래방에서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예의 그 ‘한계령’을 모기보다 작은 목소리로 열창(?) 한 후, 머쓱해서 안치환의 ‘서른 즈음에’를 연달아 부르고 난 내게 , “그놈의 한계령은 언제쯤에나 넘을라누.” 어린 제자를 걱정하시는 백발의 은사께서는 혀를 차셨다.
4. 비바, 쏠리스트 앙상블
팔순의 나이임에도, 생의 희노애락 애오욕이 그대로 녹아 있는 지고한 음의 경지를 보여준 안형일 서울대 명예교수와 오현명 한양대 명예교수의 솔로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냈다.
개인적으로는, 나또한 팔순이 되었을 때 과연 저 두 노교수의 연주에 버금가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지는 밤이었음을 고백한다.
오세종 지휘자의 물찬 제비같은 지휘와 반주를 맡은 제갈 소망의 피아노는 최상이었다. 특히, 제갈 소망의 풍부한 곡해석과 자신감 넘치는 표현은 반주를 넘어 독주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제갈 소망의 피아노가 쏠리스트 앙상블의 웅장한 화음에 기폭제 역할을 단단히 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소프라노의 여성적 음색과 첼로의 현이 가미된 솔리스트 앙상블의 음색은 여름밤의 정취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밤이었다.
비바, 쏠리스트 앙상블.
더욱 풍부한 프로그램으로 다시 만날 새로운 쏠리스트 앙상블을 기대해 본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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