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 이야기 (Douglas MacArthur)

2008. 9. 13. 21:59카테고리 없음

          더글라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장군 이야기

출생/ 1880년 1월 26일
사망 /1964년 4월 5일
출신지/ 미국
직업 /군인
학력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
경력 /1950년 국제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 지휘
        1951년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4월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

 

6·25 동란 때 맥아더 장군(Douglas, MacArthur, 1880/1/26 ~ 1964/4/5)은 미국의 극동 사령관으로서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인 맥아더는 최 일선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하루에 한 장씩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

그가 참전한 전쟁사 중 가장 위대한 작전으로 꼽히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면서도

그는 매일 저녁 함상에서 기도했다.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군 3만 8천명을 일본에 보내 훈련시키도록 한 결정도 기도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려진 것이었다.

후에 이러한 결정들이 독실한 신앙과 기도의 응답이었음이 그의 회고록에서 밝혀지기도 했으며

1950년 9월 29일 서울을 수복한 기념 연설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우리부대는 한국의 옛 서울을 해방시켰습니다.

 이 거리는 잔학무도한 공산주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으며 시민들은 다시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승리를 우리에게 되찾게 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다같이 이런 하나님을 위해 나와 함께 주기도문을 외우도록 합시다”

                                                                    <1993년 출판, 일신서적 ‘맥아더 회고록’ 202~203쪽에서>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섰고 장병들은 흙으로 얼룩진 전투모를 벗고 함께 주기도문을 외웠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이라는 구절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의 두 손을 꼭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 이 민족을 구하기 위해 보내주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전선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는 요한복음의 구절을 암송하며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맥아더는 52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던 한 노병은 이제 물러갑니다”

                                                                                           <맥아더 회고록에서>

 

이 고백 속에서 우리는 그의 삶을 이끈 가치관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며 6·25 전란 가운데 보여준 기도하는 그의 무릎이 오늘의 한국을 있게 만든 한 요인임이 새삼 밝혀졌다.

 

 

▲맥아더 장군의 갈등
워싱턴발 라디오 방송은 1951년 4월 12일 “트루먼 미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사령관, 주일 연합군사령관, 극동 미군사령관, 극동 미 육군사령관 지위에서 해임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보도했다.

맥아더 장군은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져갈 뿐”이라는 생도시절 불렀던 가사를 마지막 말로 남기고 52년간의 긴 군생활을 한반도 전장에서 마감했는데, 그의 해임에는 간단치 않은 정치·군사적 배경이 작용했다.

전장의 최고 지휘관과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의견 충돌이 급기야 ‘전선사령관 교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맥아더의 해임을 몰고 온 대통령과의 갈등은 중공군 개입 시기부터 시작됐으나 미국의 정책이 제한전을 벌일 것으로 결정되면서 더욱 악화됐다.

워싱턴 수뇌부는 전쟁을 38도선에서 제한한다는 내용을 맥아더 장군에게 몇 차례 하달했으나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는 그 명령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갈등은 유엔군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38선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면서부터 더욱 확대됐다.

▲미국의 현상유지 정책과 맥아더의 해임

워싱턴의 정책 당국자들은 51년 3월 맥아더의 ‘확전 의지’에 제동을 걸기 위해 대통령의 성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성명에 앞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유엔군이 38선에 도달할 무렵 맥아더 원수가 기자회견에서 다시 확전을 주장한 것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워싱턴의 명령을 무시하고 “유엔이 현재의 군사적 제한 조치를 풀고 군사행동을 중국의 해안선과 오지까지 확대한다면 중국은 곧 군사적 붕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다.

어찌됐든 이것은 곧장 영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으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왔다. 그뿐만 아니라 공산군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결지으려던 트루먼 대통령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맥아더 장군은 그 발언에 이어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강행했다. 그의 마지막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는 38선 이북으로의 진출 결심은 ‘정지보다 전진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마침내 마지막 고심 끝에 마셜·브래들리·애치슨·해리먼 등 참모들과 협의를 거쳐 51년 4월 12일 ‘맥아더 원수 해임’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고 말았다. 그의 후임으로는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했다. 맥아더 장군의 해임은 제8군에는 물론 전쟁 전체에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해임된 이후에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미 국민들이 아이젠하워보다 맥아더를 두 배 이상 큰 규모로 환영했다는 것이 화제가 됐고 또 흔히 말하는 맥아더 청문회라고 불리는 상원의 군사외교합동위원회에 소환됐을 때에도 많은 화제를 낳았다.

그러나 그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자기 정당성을 변호했고 급기야 대통령까지 공격함으로써 세상의 빈축을 사게 됐다. 결국 그로 인해 군인으로서의 그의 위대함에 그림자를 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장에서 보여 준 그의 신화는 전쟁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업적이었다.

<양영조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1팀장>

 

아버지의 기도 / 맥아더장군


오, 주여!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에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정직한 패배 앞에 당당하고 태연하며,

승리의 때에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여

하나님과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깨닫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이끌지 마시고,

자극받아 분발하도록 고난과 도전의 길로 인도하소서.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게 하시고,

실패한 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마음이 깨끗하고 높은 이상(理想)을 품은 사람,

남들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

웃을 줄 알면서도 우는 법을 결코 잊지 않는 사람,

미래를 향해 전진하면서도

과거를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 모든 것들 외에 그에게 유머 감각을 주소서.

그리하면 항상 진지하면서도

결코 지나치게 심각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겸손을 가르쳐주소서.

그리하면 진정한 위대함은 소박함에 있으며,

진정한 지혜는 열려 있으며,

진정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할 것입니다.

그 애가 이런 사람이 되었을 때

저는 감히 그에게 속삭일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