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에서 축복하고 싶은 사람, (조선욱 목사님 설교)

2008. 12. 8. 11:24설교

조선욱 목사님 설교

 

<한 해의 마지막에서 축복하고 싶은 사람>

 

 

한 해의 마지막에서 축복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딤후 4;19-22)

1) 성탄절과 새해가 동시에 맞물려 있는 12월이 주는 교훈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12월을 뒤집으면 1월이 되기에 모든 의미는 역설적일 것입니다.

한 해의 결산인 동시에 새해의 결심의 의미가 있는가 하면, 최후인 동시에 새로움에 대한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짧은 인생 연륜에 더 짧은 목회 연륜이지만 마지막 마무리가 아름다운 인생이 가장 아름답게 산 인생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살면 살수록 그 깨달음이 맞다고 여겨집니다. 마흔 나이의 중반을 넘기신 분들은 인생의 마침표를 잘 찍도록 지금부터라도 늘 기도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무병다복(無病多福)하며 후대에게 존경을 받으며 건강하고 여유가 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부르심도 영광스럽도록 기도하십시오.


2) 사도 바울의 인생을 추적하면 핍박자 사울에서 시작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한 이후에 그의 삶은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평생을 사도로, 예수님의 제자로, 복음 전도자로, 이방 땅의 선교사로 살다가 그 마지막은 순교자로 마감합니다. 로마서에서 히브리서까지 13권의 서신을 기록하는데 최후의 서신인 디모데후서는 그의 영적인 아들이자 제자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4장으로 된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장은 사도 바울의 최후의 유언(遺言)과도 같기에 무게 중심을 갖고 읽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오늘날까지 믿음으로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관제의 부음처럼 마지막 피와 땀과 눈물 한 방울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제단에 모두 다 쏟았다고 고백하며 이제 곧 다가올 순교의 잔을 착잡한 심정으로 기다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


3) 바울은 자신의 최후가 서서히 가까워 옴을 느끼는 최후의 순간에, 그가 기록한 최후의 성경인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장에서 바울은 한 가정을 기억하며 디모데에게 안부를 부탁합니다.

바로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성경에 총 6 번 등장하는 이 부부는 아마도 부인 브리스길라가 더 믿음이 좋았던지 여섯 번 중에 네 번이 부인 이름이 먼저 등장 합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에 고린도에서 이 부부를 만납니다. 고린도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아볼로에게 성경을 풀어 가르칠 정도로 성경에도 능통했습니다.행18;24-26 장막(텐트)업으로 생업을 유지한 오늘 우리 시대로 보면 건축업자였던 이 부부는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큰 후원자가 됩니다. 그 힘이 얼마나 컸던지 바울은 로마서를 마감 하면서 이 부부를 한 번 더 축복하는데 바울이 전하는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도 내어 놓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고 합니다.


(롬 16: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4) 이 부부는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바울을 보면서 그들도 그대로 헌신합니다. 전도자 바울이 한 곳에서 교회를 세운 후에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한 후에 교회를 세우고 또 다른 도시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들도 함께 갑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도가 그의 사명이었고 다른 도시로 장소를 옮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 부부에게는 그들 나름의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주 이사를 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에 헌신하되 목숨을 걸 정도로 최선을 다하여 힘이 되어 줍니다. 바울에게 얼마나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우리 시대에서는 바울의 무게는 대단하지만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12 사도가 주류였고 베드로가 그 계열의 회장이었습니다. 당시의 바울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주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바울이 유명하든 않든 이방 땅을 향하여 목숨을 걸며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보며 바울과 거의 복사판 인생으로 삶을 걸었습니다.


5)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 셋이 있는데 장님과 119 소방대원과 총알택시기사라고 합니다. 장님은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소방대원들은 물불을 안 가립니다. 총알택시 기사는 막 갑니다. 한 마디로 목숨 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에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부부가 바울의 그 복음 사역을 돕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지고 교회를 섬깁니다. 섬김의 한계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세운 그 한계선까지 갔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한계선을 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많은 희생을 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굴라 브리스가 부부는 그 한계를 넘습니다. 그래서 목숨까지 걸었고 그러다보니 타 도시로 이사 가는 일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6)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그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노동자 일년 월급이나 해당하는 값어치의 향유를 담은 옥합이라 이름하는 그 병 또한 얼마나 값진 것이었겠습니까?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옥합병을 재활용하지 않고 깨뜨립니다. 꼭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섬겨야 잘 섬기는 것입니까? 멀리서라도 물질적으로 넉넉한 후원자가 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정도로는 이 부부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힘들었던 그 시대에 그들도 세상에서 할 일들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포기하고 바울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그들을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우리가 천국에서 바울을 당연히 만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불편하고 열악했던 그때 어떻게 종횡무진으로 그렇게 일할 수 있었느냐고 묻지 않겠습니까? 그때 바울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바울 옆에서 목숨을 걸며 힘이 되어준 아굴라 부부가 있었기에 그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단호하게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 베다니 촌의 나사로


7) 주 예수님께는 베다니에 살았던 나사로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두 단어로 압축하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두 단어를 위하여 그분은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는 일은 죽으면 되지만 다시 살아나는 일은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십자가의 때가 가까이 오면서 자주자주 부활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제자들이 이론적으로만 들었나 봅니다. 예수님께는 실제인데 제자들은 이론이었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실 때는 아니었고 이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설명하자면 한 사람을 죽이셔야 했고 그리고 다시 살리셔야 했는데 그 일에 나사로를 선택하십니다.


8) 일찍 부모를 여읜 나사로는 여동생 마리아 마르다와 함께 베다니에서 오붓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약사도 의사도 고치지 못하는 병에 걸렸습니다. 여동생들은 급히 주님의 거처를 찾았고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지금 병들었으니 빨리 오시라는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인접한 동네에서 그 전갈을 받은 예수님은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참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지금 생명의 경각에 달렸다는데 왜 가지 않았을까요? 나사로가 빨리 죽어야 했습니다. 죽기를 기다렸는데 정말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 그를 죽음에서 살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활이 이론이 아니고 실제라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9) 예수님 측에서 나사로를 생각하면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하며 동시에 감사했겠습니까? 그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은 12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니 그럴 인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지명합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고난의 극점은 바로 죽음입니다. 부활을 설명하기 위하여 누구 한 사람 죽여야 되는데, 그리고 다시 살려야 되는데....... 그가 나사로입니다.


10) 예수님도 최후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 시간을 기독교에서는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일요일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약 4-5일 간을 당신의 마지막 생애로 예루살렘에서 체류하십니다.

그 마지막 주간에 예수님은 온 하루를 단 한 집에서 머뭅니다. 그 집이 누구집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나사로의 집입니다.

간간히 그러셨기에 그날의 머무심의 의미를 나사로 형제들은 잘 몰랐지만 그날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에서 온 하루를 머무시면서 그 형제들에게 마음껏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아직 죽음의 경험이 없었던 주님은 나사로에게 죽음의 아픔도 물으셨을 것이고 부활의 기쁨도 경험하지 못하신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의 간증도 새겨들으셨을 것입니다.


아굴라 부부와 나사로


11) 지난 2003년 7월 25일 오전 9시 9분경, 서울의 영등포역에서 근무하다가 역 구내

선로에 떨어진 열 살 쯤 어린이를 구해내려다, 어린이는 구했으나 자신은 마주 오는

부산행 새마을호 열차에 왼쪽 발목과 오른쪽 발등이 잘리는 사고를 겪었던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선생님을 아시죠? 접합수술이 실패하면서 완전히 절단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7번의 대수술을 받아 지금은 어느 정도 완치된 지금의 경인선 역곡역의

역장이십니다. 김씨는 두 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깨자마자 “아이는 어떻게 됐나요”

라고 물은 것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살신성인의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그분의 덕분에 목숨을 구하게 된 어린이와 그 보호자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안부를 묻는 연락조차 없다고 합니다.


12)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목숨 같은 사랑’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 사랑을 갚으셨나요?

어려울 때에 도움을 준 은인을 잊지 못합니다.

그것도 목숨을 걸면서 도왔다면 더욱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마지막 달이 마감하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시고 축복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겨울 전에’라는 말을 강조합니다.딤후4;21 지중해 연안은 겨울이 되면 바다가 언다고 합니다. 항해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지중해의 겨울이랍니다.

그렇듯이 은혜를 갚고 싶어도 갚을 수 없는 그때가 오기 전에, 12월이 가기 전에 그분을 찾으십시오.


13) 간만에 찾아온 추위를 보며 이제야 겨울 같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그 사람만 생각하면 따뜻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 사람을 이 마지막 달에 축복하십시오. 바울에게 아굴라 부부처럼, 예수님께 나사로처럼 바로 내게 은혜를 주신 그분을 축복하는 따뜻한 계절이 되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08, 12, 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