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ures at an Exhibition Promenade Modest Mussorgsky 피아니스트 제갈소망

2015. 12. 10. 21:21제갈소망 연주

Pictures at an Exhibition Promenade Modest Mussorgsky 피아니스트 제갈소망

 

 

 

 

 

<이 곡의 배경 설명>

무소르그스키는 ‘쿠치카(억센 무리)’란 러시아 국민음악파 5인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러시아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포함한 여러 관현악곡과 피아노곡들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가장 사랑을 받는 것은 <전람회의 그림>이다. 이것은 본래 피아노곡이지만, 프랑스의 인상파 작곡가인 라벨이 그림 같은 관현악으로 편곡한 것이 더 많이 연주되고 있다.

 

이 걸작 <전람회의 그림>은 우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소르그스키가 속해 있는 러시아 국민음악파 5인 그룹을 끔찍이도 떠받들던 건축가이자 화가인 빅토르 하르트만이 31세라는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자 그 이듬해 하르트만의 예술을 사랑한 사람들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그의 유작전을 열게 된다.

 

여기에는 하르트만의 스케치·건축 설계도, 그 밖의 여러가지 디자인 등 모두 4백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하르트만은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을 높이 평가해 주고 진심으로 격려해준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무소르그스키는 이 전람회에서 하르트만을 추모하는 10점을 뽑아 피아노곡으로 삼게 된 것이다.

 

첫째 곡 <난쟁이>는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워 보이는 괴상한 난쟁이의 뒤뚱거리는 모습, 둘째 곡 <옛 성>은 중세 이탈리아의 옛 성에서 음유시인이 애인을 위하여 세레나데를 부르는 모습, 셋째 곡 <튈르리 궁전, 어린이들의 다툼>은 파리에 있는 튈르리 궁전 정원에서 아이들이 장난하다가 다투는 광경, 넷째 곡 <소달구지>는 거친 시골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폴란드의 바퀴 큰 달구지, 다섯째 곡 <달걀 껍데기가 붙은 병아리의 춤>은 하르트만이 발레 의상을 위해 그린 작품에서 힌트를 얻어 작곡한 병아리의 춤, 여섯째 곡 <사뮤엘 골덴베르크와 슈밀레>는 절구통처럼 뚱뚱하고 거만한 부자 사뮤엘과 깡마르고 비굴한 가난뱅이 슈밀레와의 대담, 일곱째 곡 <리모주의 장터>는 프랑스 소도시 리모주의 시장 풍경, 여덟째 곡 <카타콤>은 화가가 호롱불을 들고 고대 로마시대의 지하 분묘를 찾는 정경, 아홉째 곡 <바바야가의 오두막>은 러시아 전설에 나오는 마귀 할머니인 바바야가가 사는 집, 열째 곡 <키에프의 성문>은 고대 러시아 양식의 둥근 지붕 모양을 한, 유서 깊은 소(小) 러시아인의 대도시 키에프의 큰 성문을 나타낸 것이다.

 

<전람회의 그림>은 10곡으로 되어 있지만, 중간중간에 전주와 간주의 구실을 하는 프롬나드 (산책이라는 뜻)도 연주된다. 이 모음곡은 배열도 매우 훌륭하지만 독창성이 넘쳐 흐르기 때문에 1백여 년이 지난 현대에도 새로운 시대 감각을 느끼게 한다. 무소르그스키는 국민음악파 5인 그룹이 거의 다 그렇듯이 정규적인 음악 수업을 받지 않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지만, 일찍이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워 7세 때 리스트의 피아노곡을 치고 9세엔 존 필드의 피아노 협주곡도 칠만큼 천재성을 보인 바 있다. 이같은 자질이 나중에 <전람회의 그림> 같은 최대 걸작을 낳은 것이다.

 

오늘날 이 곡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대 지휘자인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위촉을 받고 관현악 조곡으로 편곡해서 1922년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 뒤였다.

전곡은 10편의 음화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람회장에서 진열순으로 연주된다. 먼저 보행의 주제에 의해서 시작된다. 이 보행 주세는 그 뒤에 오는 각 곡 사이에서 연주되면서 전람회장의 작품에서 작품으로 옮겨지는 보행을 나타내며 동시에 관람자를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주제는 끊임없는 박자의 변화로 러시아 음악의 특성을 보여주는데, 그림 하나하나에서 받은 작곡가의 인상이 그대로 보행주제 위에도 반영된다.

 

Modest Petrovich Musorgsky (1839.3.21~1881.3.28) 러시아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후반에 러시아에서는 국민 음악 운동이 일어났다. 슬라브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을 건설하려는 기운이 감돌았는데, 그 운동의 중심은 이른바 5인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무소르그스키도 그 주요한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처음 그는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7세 때에 벌써 리스트의 소품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3세 때 근위 사관 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프레오브라젠스키 수비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군 병원에서 군의관이었던 보로딘과 알게 되었고 큐이, 발라키레프 등과도 교우를 맺었는데, 그 후로 그는 발라키레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22세 때 그는 군에서 떠나 음악에 전념하였는데, 1860년에 작곡한 오케스트라곡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친구들의 충고를 받기는 했지만, 사실 음악은 독습하다시피 하여 실력을 쌓았던 것이다. 그는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으로 음악인으로서의 기초를 완전히 닦았다. 1863년 그는 5인의 동지들과 공동 생활을 하였는데, 2년 동안의 생활이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 활동이 원숙해졌을 때에 생활고로 인해 다시금 체신부의 관리가 되었다. 한 때 그는 고민한 나머지 알콜에 중독되었으나 전지 요양을 통해 다시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갔다.

 

다시 그는 궁내성 산림과에 근무하면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쓰기 시작하였다. 1871년 여름, 그의 친구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죽었는데, 그 친구가 남긴 작품의 전람회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피아노 곡집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하였다. [보리스 고두노프]가 공연된 이후 그는 옛 친구들로부터 떠나 다른 주석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그는 관리 생활을 중지하였고 경제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881년 2월, 돌연히 발작하여 병원에 입원했다가 더 악화되어 작고하였다.

 

그는 5인조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곡가였다.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음악적인 천분과 러시아 민요의 표현 요소 등을 소재로 하여 가장 우리들과 친숙하고 진실한 음악을 작곡하였다. "예술은 그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하여 이야기를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란 음악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의 연주는 감정을 높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담화와 억양을 표현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는 유렵의 고전 음악의 전통에 반항하여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의 대표작인데, 거기에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표현주의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30세기 초의 서양 음악의 동향을 미리 암시해 주었다고 하겠다. 비록 그의 작곡 기교는 유치했지만 샘과 같이 솟아 나는 즉흥적인 착상과 드라마틱한 연출은 비범하며 비할 바 없는 미묘한 감각을 간결한 수단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생각한 바의 줄거리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전개시키는 재능이 부족한 것이 그의 약점이다. 그의 음악은 심도 깊은 우울함과 격렬한 정렬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말하자면 그는 근대 러시아가 낳은 가장 독창성이 풍부하고 야성적인 현실주의 작곡가로 천품을 나타낸 작곡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