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기 정신/ 가나안농군 학교

2012. 6. 16. 20:02기타2

 

조선일보 A30 면

萬物相 ‘김용기 정신’

 

입력 : 2012.06.12 23:02

 

5·16 직후인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지금의 하남시 풍산동 가나안농군학교를 찾았다.

농촌 개척의 새 바람을 일으키는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간식으로 감자와 빵이 나오자 박 의장은 무심코 빵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김용기(1908~1988) 교장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식사 전에 꼭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자'고 외쳐야 합니다.

" 박 의장은 물었던 빵을 내려놓고 일행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1966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막사이사이상 시상식이 열렸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각국 사절과 손님 1000여명이 들어찼다.

검은 정장 차림 수상자들 사이에 삼베 두루마기 입고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시아 농부로는 처음 상을 받는 김용기였다. 그는 "농업을 통해 세상의 가난을 몰아내고 평화를 이루는 게 꿈"이라고 연설해

 누구보다 큰 박수를 받았다.

 

 ▶김용기가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1962년 우리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였다.

그는 아내와 아들·딸 일가족 8명의 힘으로 동부면 야산 4만㎡를 기름진 땅으로 일군 뒤 개척 경험을 나누기 위해 학교를 열었다.

 그의 집엔 온돌을 비롯한 난방 시설이 전혀 없었다. 대신 벽을 한 자 넘는 두께로 쌓고, 문을 이중으로 달고,

지붕에도 흙을 두껍게 입혔다.

 

▶김용기는 생일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생일은 환갑 되는 해부터 사회에 공이 있는 사람만 치러주자"는 게 지론이었다.

 "세상에 태어난 것이 좋은 게 아니라 태어나 좋은 일을 하는 것에 탄생의 뜻이 있다"고 했다. 그는 와이셔츠 입고 넥타이 맨 적도 없다.

 늘 직접 디자인한 국민복을 입었다. 1966년 10월 4일자 조선일보는 전날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열린 김용기의 차남과 장녀

합동결혼식 소식을 전했다.

 신랑은 국민복, 신부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예물 대신 악수를 나눴다. 두 쌍 결혼식 비용 2만원 대부분이 하객에게 대접한 국수값이었다.

 

 ▶근면·절약·봉사의 '김용기 정신'이 서려 있는 하남 가나안농군학교가 올해 말 사라질 운명이라고 한다.

 이 일대가 보금자리주택 지구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토지 보상금으로 양평 야산에 새 터를 사고 나니 남는 돈이 없다고 한다.

 50년 동안 가나안농군학교를 거쳐간 입소생이 70만명. '김용기 정신'은 이들을 통해 온 사회로 퍼져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는

큰 힘이 됐다.

시절이 바뀌고 먹고살 만해지면서 가나안농군학교를 찾는 발길도 뜸해지고 있다. 개척자 김용기에 대한 기억도 머지않아

사람들 머릿속에서 사라질지 모른다.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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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상] 70만명 거쳐간 가나안농군학교 '눈물의 이사'
 

 

 

50년 만에 터전 옮기는 '새마을운동의 모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 새벽 5시면 울리던 개척종 "새벽종이 울렸네" 노랫말로
한국인 '하면 된다' 정신 심어
턱없이 부족한 토지 보상금 - 보금자리지구 포함돼 옮겨야… 양평에 부지 사고 나니 끝
"건물 지을돈 없어 애가 탄다"

"난 평생 돈 버는 재주 없이 살았고, 돈 바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큰 학교를 옮기려고 보니 돈이 너무 많이 드네요. 건축비는 고사하고 터 닦는 데만 15억원이 든다고 합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누군가 금전적으로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새마을운동의 모태가 된 경기도 하남시 가나안농군학교. 지난 8일 오후 학교에서 만난 김평일(70) 교장은 창립 50주년을 맞아 경기도 양평으로 학교를 옮기는 소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고(故) 김용기 장로)가 살아계실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내가 뭘 도와드릴까요?' 하니 아버지는 '그저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라며 거절했습니다.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지키려 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가 없네요."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산 52-2번지. 농장과 대지를 합쳐 총 4만㎡(1만2000평) 규모의 땅은 1962년부터 농군학교의 터전이었다. 번지 앞에 산(山) 자가 붙었지만 나지막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용기 장로와 김 교장이 대를 이어 야산을 50년간 가꿔왔기 때문이다.

학교 부지가 2009년 정부 시책에 따라 보금자리주택지구에 포함돼 학교를 옮기게 됐지만, 토지 보상금이 턱없이 적었다. 산 번지인 데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탓이다. 경기도 양평에 새 부지로 6만6000㎡(2만평)짜리 야산을 사고 나니 남는 돈이 없었다. 그는 "지난 3월까지 땅을 비워달라고 했는데 올해 말까지로 미뤄 버티고 있다. 국가에서 하는 일이니 따르겠지만, 돈이 없어 새 부지에 교육관·농장·식당·생활관 등을 짓지 못해 도저히 못 옮긴다"고 말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1954년 고 김용기 장로가 야산을 개간해 만든 농장에서 시작됐다. 농장의 수확량이 늘자 인근 주민들과 공무원이 농사법을 배워갔다. 체계적으로 농민교육을 하기 위해 1962년 농군학교를 세웠다.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국민과 우리나라가 잘살게 하는 게 내 목표인데, 김 선생이 벌써 이뤘다"고 했다. 1960년대 중반 한 달간 총리실 사람들이 농군학교에 파견됐다. '하면 된다' '가난을 싸워 이겨야 한다' 등 농군학교에서 쓰던 말이 1970년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구호가 됐다. 새벽 5시에 울리는 농군학교의 '개척종(鐘)'은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노래가 됐다.

이후 50년간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두 딸, 박근혜·이재오 의원 등 정치인과 경제인, 연예인, 직장인, 학생 등 7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농군학교에서 3~15일간 머물며 교육을 받았다. 태국·우간다 등 외국 관리들도 찾아왔다.

김 교장은 "처음 학교를 옮겨야 한다고 했을 때 너무 화가 나 이마에 빨간 띠 두르고 청와대 앞에 갈 마음까지 먹었다"고 했다. 이후 3년간 곳곳을 찾아다니며 '역사적 장소이니 철거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탄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수십년간 얼굴 보며 살던 동네 사람들도 보상금을 받고 하나 둘 떠났다. 그는 "이웃도 없이 우리만 덩그러니 남아서 뭐 하겠느냐"며 흙벽돌 쌓아 지은 학교 건물과 교회를 유적지로 남기는 조건으로 학교 터를 옮기기로 했다.

그는 "양평 시대가 열리면 제2전성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상기 본문은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6/12/2012061200204.html (감혜림 기자 작성) 에서 갖고 온 것입니다.

 

김평일 제1가나안 농군학교 교장님

 

 

 

대구 모교회에 강사로 오셨을 때 인사 갔다가...

인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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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제2가나안 농군학교(원주 신림 소재) 에서 4박 5일 간 교육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꽤 좀 먼거리를 구보를 하고 땀을 흘린 후 아침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땅은 정직하니 땅과 친하고... 

땀을 흘리는 것은 아름다운거라고 ...,

부지런하라고 ...

식사를 하기 전에 농부들을 생각하라고 ....

쌀 한 톨을 귀하게 여겨 밥 한알도 흘리거나 남기지 말라고 ...

 

아무튼 ,

농군학교를 다녀온 다음 더욱 부지런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집안의 사위가 된 후 그 먼 신림을 다닌다고 죽령고개를 돌고 돌아( 터널이 뚫리기 전) 다녔던 추억이 있습니다.

제1 가나안 농군학교가 부득불 이전해야만 될 형편이라는 기사를 보고, 아~ 하나님께서 분명 더 좋은 곳에 더 큰 학교를

주시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깁니다. 

 

 

 

 

 

김용기 정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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