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9]

2008. 12. 24. 00:26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9]

 

나는 그들과 함께 지서로 갔다. 지서 앞에선 상리의 여러 청년들이 지나가는 보병전투부대를 열심히 환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주의를 주었다.

"여러 동지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우리 앞에 있을지 모르나 우리고장에서는 불미한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잘해 봅시다. 한사람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중해서 한 건의 불상사도 없도록 처신합시다.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다 함께 노력합시다."
모두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합시다. 정빈 동지의 뜻을 따라 우리고장을 우리가 사수합시다."
"그러면 우선 일 할 수 있는 조직체를 잠정적으로나마 구성하여 봅시다. 우선 명칭부터 정하지요."

강선봉이 자위대라고 하자는 의견을 내 놓았지만 나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명칭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치안대라고 하는 것이 어떤가 의견을 내 놓자 다른 동지들이 동의하여 결국 {조안 출장소 치안대}라고 명칭을 붙였다.
대장엔 내가 선출되었다. 부대장에 강선봉이 추대되었으나 한사코 거절하여 부대장은 두지 않기로 하였다. 나는 심사숙고하여 임원을 선출했다.
"경비책임자는 주 동지.
"정보책임자는 최 동지.

"구호책임자는 표 동지 이렇게 책임을 부탁합니다."
아무도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굳은 의지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악수를 교환하였다. .
유월이십팔일, 오전 열한시경이였다.
각 반장으로부터 각 부락의 동향 보고를 받고 있을 때에 인민군 여섯 명이 중의적삼을 입은 청년 한사람을 따발총으로 위협하며 지서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우리대원들은 모두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칸나새끼야 너 국방군 패잔병이지?"
인민군이 따발총 개머리판으로 청년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청년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니올시다."
"무엇이 아니야. 머리를 보면 다 알 수 있어 전투모를 쓴 자리가 이렇게 있는데도 아니라고 해? 이 새끼야! 일어나!"

청년의 얼굴이 백짓장 같이 하얗게 질렸다. 총검 앞에 끌려 밖으로 나가는 그의 참담한 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한없이 아팠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면 죽어 가는 생명을 살려보자고 작정하였다. 나는 용기를 내여 인민군에게 말했다.
"인민동무 꼭 부탁하나 합시다. 내가 보기에 저 사람은 국군이 아닌 듯하니 우리에게 맡기고 전진하시죠."
인민군은 대번에 눈을 부라렸다.
"동무, 꼼짝 말고 여기 있으시오, 따라 나오면 그냥 두지 않겠오."
더 이상 말을 건네기가 어려웠다.

낙오병이 끌려나간 지 오분정도 되었을 때에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잠시 후
현장을 보고 오겠다고 달려갔다 온 김 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숨찬 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이 총살을 당했어요, 인민군은 벌써 가고 없고요. 저기 언덕길 넘어 오른쪽 강변산협에서 총살했는데 참으로 비참해요. 보기가 흉해요."
동족이 동족을 눈 하나 까딱 않고 죽이는 현실, 이 엄청난 비극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저녁때에는 삼봉리 송촌리 진중리 등을 돌아보고 온 대원들로부터 별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러나 조안국민학교로 들어가는 철로별 신협 쪽과 양수철교 가까이엔 사살된 시체가 여러구 있다는 것이다. 시체는 대부분 중의적삼이나 작업복을 입었다고 했다. 이날 정오 지나서 인민군

부대가 오전과는 달리 반대로 서울 쪽에서 내려와 양수철교를 건너 양평방면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이때에 낙오되었던 국군이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후퇴하다가 잡혀 사살된 것으로 추측되었다. 어느 노부부의 귀한 아들이었고 귀여운 아이들의 아버지였을 이 땅의 젊은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우리들 손에 의해 땅에 묻혔다. 실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밤이 되니 운길산 정상봉 및 계곡 곳곳에 조명탄이 터져 밤의 산이 대낮처럼 환한데 따발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공포심을 조장하였다.

혈기왕성한 젊은 청년들이 이리 불안을 느끼는데 연로한 노인들이나 연약한 여자들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릴까 생각한 우리 대원들은 치안업무에 혼신을 다하였다. 삼일 째 집에도 못 가고 분주한 시간을 보내던 날 밤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경비하고 있던 최 군이 뛰어 들어와 {밖에 인민군 장교가 와서 형님을 찾습니다.}하고 말했다. 밤중에 인민군장교가 왜 나를 찾을까? 의아했다. 불안한 표정을 숨길 새도 없이 인민군장교가 들어와 무뚝뚝하게 말했다.
"동무가 이곳 책임자 동무요?"
"네."

"이리 나오시오, 동무하고 이야기를 좀 합세다."
그는 나를 삼일 전에 인민군이 국군을 총살한 바로 그 장소로 끌고 갔다.
그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들고 이미터 가량 뒤로 물러서더니 총구를 내 가슴을 향하여 겨누었다.
"동무 내가 묻는 말에 거짓없이 사실대로 대답을 하시오. 만일 추호라도 거짓 진술을 하면 이 자리에서 즉결처분하겠소. 알겠소? 동무들은 무엇 하는 동무들이요?"
"이 지역 주민들의 치안유지를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치안유지를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요? 단체의 명칭이 무엇이요."
"조안 치안대라 합니다."
"대원동무가 몇 명이요."
"팔 구명됩니다."
"치안대라 했소?"
"네."
"대원들의 성분은 어떠한 성분이요."
"각 리에서 선출된 동무로써 일제 때엔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투쟁하였고 해방 후엔 농사를 지으며 지역주민들을 위해 봉사를 해 온 동무들입니다."

"동무의 집은 어데있소."
"봉안마을입니다."
"직업은 무엇이오."
"농부입니다."
"과거엔 무슨 일을 했소."
"방금 말씀드린 대로 우리 집은 봉안이고 과거 문양 여운형 선생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여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독립 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는 고등공민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을 지도교육하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한 선생이 누구라 했소?"
그의 음성이 조금 높아졌다."
"몽양 여운형 선생이라 하였습니다."

"여운형 선생 동무 집에 계시었다고요?"
"네, 그래서 우리 집은 일제 때 경찰로부터 많은 탄압을 당하였습니다."
"그분과는 어떠한 관계였소?"
"선생님의 고향이 바로 이 강 건너 양평군 신원리입니다. 일제말기 대전형무소에서 출감하였을 때 우리 집에와 계시다가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여선생님의 육촌동생이 저의 숙부님과 의형제를 맺었는데 그 분을 통해서 몽양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곳의 반동분자들은 어떻게 되었소."
"서울에서 내려와 보니 벌써 모두 가족과 함께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한 놈도 없다는 거요."
"네 없습니다."
그가 장전했던 권총을 옆구리에 차고 다가와서 말했다.
"동무 수고하오. 나도. 몽양 선생님을 존경하였소. 몽양 선생이 동무의 집에 계셨다니 반갑소."
그리고 물러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쉼과 동시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참으로 위기촉발의 순간이었다.

칠월삼일 아침이었다.
"대장님 김정훈 지서주임 가족과 심 순경 가족이 피신하지 못하고 이웃집에 은신하여 있다는 정보가 있는데 가서 데려 올까요."

대원 중 하나가 말했다. 당혹스러웠다. 인민군 눈에 띄면 큰 일이 아닌가.
나는 신뢰하고 있던 동지 최 군을 불러 특별지시를 하였다.
"최 군, 지금 곧 바로 심 순경 가족과 김 지서주임 가족을 비밀히 찾아가서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도록 하게나."
고개를 끄덕이고 나간 최 군은 서너 시간 후에 돌아왔다.
"심 순경 집에 가니 부인이 혼자 남아 있기에 다른 곳으로 피신하도록 조치를 하였습니다. 새능에 있는 김 주임가족은 이미 피신하였더군요."

그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이 날 저녁때이다.
인민군 사병들이 지서로 와서 식량보급이 잘 되지 못하니 쌀을 좀 달라고 요구했다. 쌀 한 톨이 귀한 때지만 때가 때이니 만치 안 줄 수가 없어 한 가마를 내어 주었다. 그런데 그 날 오후에 덕소 자위대로부터 쌀을 십여 가마 갹출하여 보내라는 전령이 왔다.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네 자체에서 해결할 것이지 하필이면 왜 우리에게 쌀을 보내라 지시하는지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다. 나는 바로 거절하여 보내고 우리대원들에게 단 한 톨의 쌀도 내어 주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 후에도 덕소에선 쌀을 보내라는 독촉을 여러 번 해 왔다. 일체 응하지 않았더니 며칠 후 밀서 한 통을 인편으로 보내왔다. 밀서를 개봉하여 보니 놀라운 내용이 적혀있었다. 내 숙부님과 마을의 한 면장 이현식 류대권 김정훈 김덕삼 김현옥 변학동 여덟 사람을 팔일까지 면 자위대까지 연행하라는 명령서였다. 아무리 전쟁중이라 지만 법적 기관이 아닌 임의 단체에서 어떻게 이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분노심이 끓어올랐다.

나는 주 동지와 최 군을 시켜 그 여덟 분을 피신시켰다.
칠월 십여일경 오후 늦게 이 인용 싸이카를 타고 누런 계급장과 제모를 쓴 내무서원이 덕소에서 와서 치안대를 찾았다. 그는 치안대가 남반부 관리들이 사용하는 명칭이라며 해산하고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남기고 갔다. 추상같은 명령이었다.
다음날 능안 부락에서 능내리 인민위원회를 소집하니 다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저녁 아홉 시경 모이라는 장소로 갔더니 아침부터 얼굴을 보이지 않던 우리 집 머슴 이경제가 거기 있었다. 평소엔 열심히 일만 하던 머슴이었으나 이틀 전부터 일도 하지 않고 오락가락 하던 머슴이었다.
한 면장과 한종락 이장도 와 있었다.

잠시 후 군위원회선무반원이라는 사람이 나서더니 위대한 인민해방군이 남반부를 해방시켜 남반부 인민들도 잘 살게 되었다면서 인민들을 잘살게 하는 리,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겠으니 위원회장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김정빈 동지를 추천합니다.
한 면장이 나를 추천했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선무공작원이 반대 선언을 하였다.
"그 동무는 아니 되오. 철저한 예수쟁이에다 지주계급 출신으로 농사일도 하지 않고 머슴만 부리고 사는, 성분이 가장 좋지 못한 자본주의자의 아들이요. 내가 추천하겠소. 가장 열성적인 무산계급 농민의 아들로 현재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이경재 동무를 추천하오. 여러 동무들 의의 없소? 박수!"

모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정신 없이 박수를 치고있었다. 한 면장과 몇 사람만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 날밤부터 머슴인 이경재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연일 선무공작원과 함께 각 리를 순회하였다. 강선봉은 조안출장소 인민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양수인도철교와 열차철교가 미 공군의 폭격을 받아 도강이 불가능해지자 인민군은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임시로 목교를 가설하였다. 부대이동을 위한 것이었다. 낮에는 미 공군의 폭격이 심해 일은 야밤에만 이루어졌다. 주민들은 낮엔 농사일로, 밤엔 교량부설작업으로 몸살을 앓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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