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10]

2008. 12. 24. 00:27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10]

 

 

칠월 이십삼일 오후 다섯 시경 덕소에 있는 내무소원이 싸이카 오토바이를 타고 와 저녁 아홉시까지 덕소 내무분소로 나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강선봉이도 나온다고 했다. 왜 하필 밤에 나오라고 하는 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할머니도 매우 불안해하시는 눈치셨다.

"몸조심해서 갔다 오너라. 기도하는 맘으로 갔다오너라."
할머니 말씀이 아니더라도 매사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던 터였다.
마을 앞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윗말에서 강선봉이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강선봉이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도 불안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삼십리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 더 할 수 없이 무거웠다. 밤 열시가 지나서야 내무분소에 도착하였다. 내무서원이 내 신원을 확인하더니 이유불문하고 나와 강선봉이를 면사무소 창고에 가두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강선봉의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김 동지 우리를 무엇 때문에 창고에 가두는 거지."
"별일이야 있겠는가...."
나의 앞날이 어찌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믿었다. 할머니가 기도를 하고 계시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니 별일이야 있겠는가....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창고 문이 열렸다.
우리는 분소장인듯한 내무서원 앞에 끌려갔다.
"동무들은 인민을 가장한 반동분자야 특히 정빈 네놈은 더욱 예수교쟁이로 더욱 악질 놈으로 치안대장을 한다면서 반동분자 놈들을 한 놈도 처단하지 않고 전부 도망가게 하였어. 반동분자를 옹호한 네놈도 반동분자야. 네놈이 대신 처단 받아 마땅해, 알겠어? 네놈들은 총살이야."

나는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이젠 죽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금방이라도 총살시킬 듯 으르렁거리던 내무서원이 전화를 받아 에, 예 한 후 전화를 끊더니 태도를 바꾸어 말했다.
"내가 분별 없이 과격한 말을 해서 미안하오. 동무를 그간수고 많이들 하였소. 지금 곧 의용군으로 나가시오 .남반부인민해방을 위해서 동무들, 힘써 싸워주시오. 부탁하오. 곧 의정부 내무서로 가시오."

속보인다, 이 놈아. 의용군 모집을 이러한 방법으로 협박해서 하는 구나. 가소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나와 강선봉이는 집에 가서 짐을 꾸려 갖고 내일 아침에 오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고 그 곳을 나왔다.
나는 집에 도착하는 즉시 짐을 꾸려 운혁 아저씨와 함께 한강을 건너 광주군배알미로해서 신장리를 경유 서울 정능리 박성복 동지 집에 숨어들었다. 이 집 아랫방엔 두 사람이 겨우 누울 만큼의 자리를 옷장으로 가린 비밀장소가 있었는데 우린 그곳에 숨어살았다. 한 평 남짓한 그 곳에서도 우린 온갖 소문을 다 들었다. 동네 청년들이 수없이 의용군으로 잡혀갔고 부상자들이 수없이 생겨난다는 소문도 있고 인민군들이 산발적으로 후퇴한다는 말도 있었다. 은둔한지

두 달이 지났다. 날이 갈수록 가택수색이 심해지고 있어서 마음이 한없이 초조해졌다. 차라리 비봉산 속에 들어가 숨는 것이 나을 듯 했다. 우리는 그 곳을 떠났다. 피난민 틈에 끼여 망우리 고개를 넘어 교문 리에 이르렷다. 교문리 삼거리를 지나려니 마침 조동팔 동지가 어디로 피신하였다가 서울로 되돌아오는지 리어카에다 짐을 싣고 젊은 두 사람과 같이 오는 것이 보였다. 참으로 반가웠다.
"아니 조 동지 웬 일 이예요. 여기서 만나게 참 반가워요.
"네 아.. 김 동지 참 오랜만예요. 이렇게 만나니 어디로 가는 거죠.

"서울에서 숨어 있다가 시골로 가는데요. 어찌된 일이죠.
"난 시골에 숨어 있다가 불안해서 서울로 다시 들어갑니다.
"남쪽으로 피난 못하셨군요.
"네 김 동지도 못 가셨군요,
"네.
"그럼 어서 가보시죠.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네 ,몸조심 바랍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서울로 피난을 가는 수많은 피난민들을 보며 한숨을 쉬며 헤어졌다. 저녁 늦게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다. 과수원의 농사일은 아버지혼자 하고 계셨고 마을의 청년들은 거의 보이지 아니하였다.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데 구월하순 작은 아버지께서 집에 오셔서 산으로 가자고 하셨다.

"산에 가서 무엇을 하게요?.
"아무래도 전세가 심상치 않으니 산에 가서 은신할 곳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어서 가자.
낫 도기 톱 삽 곡괭이등 작업도구를 가지고 고창벌 산 계곡을 올라갔다. 은신할만한 후미진 곳을 두루 찾아 다래 찔래나무등 넝쿨이 엉겨 우거진 한적한 곳에 넝쿨땅속을 파고 돌로 담도 쌓고 칡, 다래 찔래나무 덩쿨로 지붕을 만들어 덮어 땅속에 작은 은신처를 만들었다. 다음날부터 마을 사람들도 모르게 낮에는 과수원에 가서 일하고 밤이면 땅속에 숨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에서 아랫마을의 주막거리를 내려다보니 국군복장을 한 듯한 군 트럭이 줄을 지어 서울로 가고 있었다. 대한민국 만세! 하며 환영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작은 아버지께서 급히 집으로 오시더니 지금 곧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시었다. 입은 옷 그대로 서울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주막거리로 내려오니 서울로 향하는 기갑부대가 계속 진군하고 있었다. 마을 요소엔 국군이 경비하고 있었다. 동구 밖을 지나 말 바위 앞까지 내려오자 도로변에 뒹구는 인민군 시체가 수도 없이 보였다. 강에도 수많은 시체가 떠 있었다. 전쟁의 참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서울은 국군들 천지였다. 우리는 을지로 작은 아버지 댁으로 갔다.
서울이 수복된 지 일주일 후였다. 시골에서 아버지가 올라 오셨다. 몹시 수척한 모습이었다.

"네가 치안대 일을 어떻게 하였기에 김정훈 지서주임이 집에까지 와서 온 식구들을 총으로 쏴 죽인다고 아우성을 치며 위협하고 너를 찾아내라고 야단을 치냐?"
나는 놀라서 물었다.
"김정훈이 와서 그래요? 이유가 무엇이래요?"
"치안대를 하였다는 이유지, 너를 찾아오지 않으면 온 가족을 몰살하고 집을 불질러버리겠다고 살기 등등하다. 어찌하면 좋겠니?"
할 말이 없었다. 숙부님도 어이없으신 듯 묵묵히 계실 뿐이었다.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잠시라도 보호해 준 대가가 이것이었나 생각하니 허탈하기만 했다.
치안대장을 한 것을 몹시 후회하였다.

서울이 수복된 지 이십 여 일이 지나자 인민군에게 도움을 준 부역자를 처단하는 군검중앙합동수사본부가 종로 이가 국일관자리에 설치되었다. 본부장은 김창룡 대령 부장 검사는 오제도 검사였다. 많은 부역자들이 속속 검거되어 처벌을 받았다. 나는 자진 출두하였다. 부락주민들이 나의 죄없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진정서를 양주경찰서장과 합동수사본부장에게 제출해주었다. 주민들 가운데 오직 한사람 일제시대에 우리가정의 일거일동을 밀고하여 친일 했던 이모씨만이 빠진 걸로 알고 있다.
나는 만 이십사시간의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나왔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진정서를 제출해주신 마을주민들에게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감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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