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 [12]

2008. 12. 24. 00:29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 [12]

 

행정업무라야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대원들의 신상명세파악, 봉급수령전달, 보급물자 수령공급 문서전달 확인 등이었다. 오전만 성실히 집무하면 끝나는 단순한 업무였다. 처음 며칠은 합숙소에서 생활을 하였으나 여러모로 불편한 것이 많아 민간인 방을 얻어 기거하기로 박 경사와 입을 맞추었다. 방을 얻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녀보니 폭격으로 인하여 안동중심지 시가지가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깊이 패인 구덩이가 늘려있었다. 폭격에서 벗어난 주택도 군 사단 요원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어 방 한 칸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려웠다.

전 시내를 이틀씩 찾아 다녔지만 빈방을 구하지 못 하였다. 삼일 째 되는 날 무심코 옥야 동파출소 뒷길 판자촌을 걸어가다가 울타리를 높이 올린 판자 문이 조금 열렸기에 들어가니 안은 판잣집이 아니라 신축한지 몇 년 되지 않은 작은 기와집이었다. 집안이 고요하였다. 주인을 찾아 부르니 점잖게 생긴 분이 방에서 나왔다. 빈방이 있으면 한 칸 빌려달라고 하자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없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빈방이 없는 것이 자신의 잘못인 듯 썩 미안해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마루 벽을 쳐다보니 벽 위에 크리스마스 경축 등이 걸려 있었다. 등만 보고도 마음에 기쁨이 차 올라 교인이냐고 물으니 목사님이시란다.
한없이 자상하고 후덕해 보이는 김진호 목사.
이튿날 오후에 김진호 목사의 안내를 받아 옛 천리교건물을 약간 개조하여 교회로 사용하는 동부장로교회로 갔다. 동쪽 언덕 위에 위치하여 시가지가 다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이 교회 사택은 집사내외가 거주하며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김진호 목사가 나로 하여금 이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찾아갔을 때 방은 이미 깨끗이 정돈이 되어 있었다. 김 목사가 부탁을 해 놓았던 모양이다. 깨끗한 침구까지 준비해 둔 걸보고 나는 적이 감동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 그 날밤부터 박 경사와 함께 깨끗한 방에서 잠을 잤다. 서울 후퇴 후 제대로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나로선 교회 사택 방에서 기거하니 좋기만 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예배당에 나가 기도와 예배를 드렸다. 사지에서 구출하여 교회 안에 들여놓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김진호 목사의 배려로 편하게 생활하는 동안 나는 김 목사의 장남과 함께 고구마 온상을 설치하거나 영농기술에 대하여 토론하기도 했다.

국군이 다시 반격하여 서울을 완전히 탈환하고 행정기관이 모두 수복되었다는 희소식이 날아왔다. 이 얼마나 고대하던 소식인가.
일천구백오십일년 오월초순에 일주일간의 특별 휴가를 받아 고향을 찾아갔다. 중앙선의 화물열차는 운행되나 객차는 운행되지 않아 고향에 갈 때에는 구간, 구간 군 트럭이나 화물열차를 이용하였고 상당한 거리를 걸어서 가야했다. 꿈에도 그리던 능안부락에 이르렀다. 고향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젖는 것도 잠시였다. 나를 반겨주어야 할
우리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빈 공터만 댕그라니 남아있었다. 옆의 작은집도 같은 처지였다. 놀랍고 떨리는 가슴을 안고 당숙 댁으로 달려가니 마침 마당에 서 계시던 할머님이 나를 보고 얼싸 안으셨다.

" 아! 정빈이가 살아왔구나. 오 내새끼 살아왔구나. 어떻게 이렇게 소식 없이 갑자기 오 니? 어데 있다오니 정빈아!"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었다. 집이 그 지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식구는 모두 무사하였다. 부모님께서 집터를 보러 나가셨다는 말씀을 듣고 내가 여쭈었다.
"할머니, 집은 폭격을 당했어요?"

"폭격 당한 것이 아니라, 미군부대가 강 건너에서 이곳에 있는 중공군을 공격하기 위해 쏜 소요탄 파편이 두 집에 떨어져서 그리되었다. 집이 불에 타는 것을 보면서도 방공호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흘리시는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한없이 쓰라렸다. 도대체 이 전쟁은 누가 왜 일으켰단 말인가?
내 가족이 화를 면하였다는 기쁨 뒤엔 참혹한 소식이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많은 동지들이 감금되고 고문을 당하고 혹은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아. 전쟁. 전쟁.....
삶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허망하고도 안타까웠다.
나는 그 후 안동에서 이 개월을 더 근무하다가 모든 중앙행정기관이 서울로 복귀함에 따라 서울로 복귀하였으나 경찰관으로서의 직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 사표를 제출하였다,



10. 행정공무원으로서 삶

엄동설한에 움츠렸던 산천의 초목들이 따뜻한 봄 햇빛을 받아 새싹들이 새롭게 예쁜 옷으로 소생하는 어느 봄날 오랫동안 소식이 두절되었던 박성복 동지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여성구동지가 양평군수로 발령 받았는데 나를 만나게 해 달라는 부탁을 했노라고 했다.
"왜 만나려하는지 아세요?"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전에 김동지 집에서 많은 신세를 진 것도 있고 또 여 군수 자신이 농촌실정을 전연 모르고 있으니 협조를 부탁하는 거 같아요."
"그래요?"
"김동지는 여성구 군수와 매우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 아닙니까. 내려가서 좀 도와 드리세요."
"글쎄요. 내가 내려가서 도움이 될까요. 여 군수는 믿고 하는 것이겠지만..."
그를 보내고 곰곰이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보았다. 과연 내가 그곳에 가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혹여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가, 많은 생각 끝에 나는 가기로 결심을 했다.
다음 날 양평으로 내려가서 오년 만에 여성구 군수를 만나보았다. 그리고 행정공무원으로 서의 출발을 했다.
일이야 열심히 하면 힘들 것이 없었으나 군수가 친구이다 보니 매사에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른 직원들 입장에서 보면 나는 군수의 측근이요 끈이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언행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한편 특별한 용무 외는 군수와 직접 면담하는 것을 자제하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양평에 온지 두달이 될 무렵 양평농업고등학교앞 큰 길옆에 있는 초라한 나의 방 (그 때 나는 작은방 한 칸을 빌려 살고있었다.)에 할머님이 찾아오셨다. 봉안에서 양평까지는 칠 십리 길이건만 할머니는 걸어오셨다. 차멀미로 인해 차를 타시지 못한 까닭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사는 집을 물끄러미 돌아보셨다.
싸리채를 둘러 방풍 제를 한 그 집은 보통의 비바람에도 부엌은 물론 방 안까지 온통 물바다가 되었고 방문과 창문이 비에 젖어 갈기갈기 찢어지는 그런 집이었다. 한참 집을 둘러보시던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보고파서 참다못해 이렇게 찾아왔다."
나는 할머니를 껴안고 한없이 울었다.
할머니도 눈물을 흘리셨다.
"객지에서 내손자 얼마나 고생을 하고있니?"

"고생은 없어요. 여군수가 잘 보살펴 주어서 편해요. 할머니 아무 염려 마세요."
"그래. 성구도 잘 있고?"
"네..."
"군수부인은 어떠한데 ? 한번도 보질 못해서...."
"저에게 잘해줘요. 쌀도 반찬도 가끔 보내주곤해요."
"방이 좁아서 어떻게 여기서 살지?"
"안 그래도 넓은 방을 알아보려던 참이에요."
"빨리 구해 보아라. 여기서는 못산다."

"할머니 여기 오래 계세요. 저하고 같이 사세요. 할머니"
"오래 있지는 못한다. 과수원일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가 맨날 들에 나가는데 내가 집이라도 봐 줘야지. 며칠만 있다 가겠다."
할머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시다가 기어이 한마디 하셨다.
"성구가 방이나 좀 좋은 걸 얻어주지 않고서...."
못 내 서운하셨던 모양이다.
한평생 손자사랑이 지극하셨던 할머니는 이듬해 다시 칠 십리 거리를 걸어 나를 보러 오셨다.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나들이였다. 오신 이튿날, 점심상을 물리시고 밖으로 나오시다가 방문 틀에 머리를 부딪혀 쓰러지신 할머니는 그만 깨어나지 못하고 만나흘만인, 오십사년 팔월사일 새벽네시경 하늘 나라로 가셨다. 이 손주를 찾아오셨다가 변을 당하셨으니 그 망극함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할머니의 신앙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결하신 참 사랑의 신앙이었다. 매사에 철저하시고 용감하시고 특히 불의에는 한치의 타협이나 양보가 없으신 불굴의 신앙정신으로 살아오신 분이셨다.


할머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양정계에서 내무과 회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여군 수는 민의원에 출마하기 위해서 사임하였다. 그는 구필회씨, 천세기 씨와 경합을 벌였으나 낙선하여 처가에서 경영하는 대구중공업회사에 사장으로 부임하여 서울을 떠났다.

양평군에 근무한지도 벌써 일년 반이 지나고 있었다. 식구가 늘었다. 셋방살이를 세 번씩 옮기면서 협소한 생활을 하던 나는 60평의 대지를 구입하며 아담한 내 집을 마련하였다. 방 두 칸 마루, 부엌 모두 여덟 칸의 작은 집은 시내에서 철거하는 구옥의 헌 목재를 저렴한 가격으로 매입하여 지은 것이었다. 새 집에 입주 하던 날 밤 아버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께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집을 지으셨을 때 이웃사람들이 부러워하며 집구경을 왔었다. 그 때 아버지는 퍽 자랑스러우셨을 것이리라. 나도 비록 작은집이지만 내 집을 지었다는 자부심으로 기뻐하였다. 새로운 내집에 들어오니 세상 것이 다 내 것인 냥 흡족하고 소유한다는 그 기쁨이 형언할 수 없었다.

오십오년 이 월초엔 사급승진시험에 합격하여 서무계장으로 발령 받았다. 서무계장의 첫 업무로 나는 경기도 관내 사군으로선 처음으로 '양평군지' 라는 단행본을 발간하였는데 이는 토지, 인구, 산업교육, 문화 각 분야의 자료를 수집하여 발간한 것이었다. 나는 이를 도본청 및 각시군 및 사업소에 배부하여 행정업무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오십칠년도는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많은 일을 하는 해가 되었다. 그 해 연초에는 민원이 많은 보건사회행정을 담당하였는데 혼란한 행정공백기를 이용하여 무면허 의료행위와 무허가 요식업행위가 난무하였다. 단속을 받는 사람 중엔 중앙에 무고한 진정을 하는 사람도 있고 기만 환씩 들 고와서 내 신앙을 시험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겉으론 냉정하게 뿌리쳤지만 속으론 신앙의 양심을 지키느라 애를 먹었다. 특별히 어려웠던 행정은 원호사업이었다.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한 군상이자들이 매일 십여명씩 관공서를 찾아와 무례하게 구호를 요구하였다. 상이자들이 군청으로 몰려 들어올 때에는 전 직원들이 벌떼를 만난 듯 도망하는 일이 허다했다. 전쟁직후 유족과 상이자 에게 지급되는 국가

의 보상금은 형편없었다. 이 때문에 상이 자들이 전국을 누비고 방황하며 국민들에게 구호를 요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비극이었다. 상이자 나 국민이나 모두가 피해자였다. 한번은 집무를 하고 있는데 군상이자들이 군청사내로 들이닥쳤다. 걸음이 가능한 상이자 가 양쪽다리가 허벅지까지 절단된 상이 자를 등에 엎고 들어와서 도세계장 책상 위에다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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