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14]

2008. 12. 24. 00:32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14]



상호비방의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가운데 드디어 3.15 정.부통령선거의 날이 되었다.

양평군에서도 큰 충돌이나 불상사 없이 선거가 진행되었고 저녁 일곱시부터 군 청사에서 개표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후보의 득표상황은 구십육.칠퍼센트를 오르내렸고 부통령후보도 팔십사오퍼센트를 오르내렸다. 백퍼센트 가까운, 유사이래 없는 좋은 득표였다.

개표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새벽 다섯 시 전에 모두 완료되었다.

득표율이 높아서 그런지 경찰에서는 송목사님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십 여일이 지나도록 목사님이 무사하자 나는 안심을 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국민의 여론이 분노로

치닫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선거야, 사전투표를 하였다, 투표함을 바꿔치기 했다, 무더기 대리투표를 했다, 등등의 비난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나는 4월 6일 부터 수유리에 있는 경기도 공무원 교육원에서 20일 간의 연수를 받게 되었다.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열시까지 받는 교육이었다. 이 교육 도중에 마산시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군중의

데모가 연일 계속되더니 마침내 사상자까지 발생하였고 그 여파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서울에서도 대학생들은 물론 고교생들까지 합세하여 거리로 뛰쳐나왔다. 데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극심하여지고 있었다.

22일 경에는 시내 요소의 파출소가 데모 군중들의 습격을 받아 전소되는 등 전 시가지가 치안부재로 돌변하는 듯했다. 총성과 함성, 화염은 연수원에서도 볼 수 있었다. 나와 같이 교육을 받는 연수원생들은 모두 불안에 떨었다. 데모 학생들이 연수원을 기습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결국 종강 수료식을 3일이나 앞당겨 하게 되었다. 기념사진 한 장만 받아들고 연수원을 나와 미아리로 나오니 파출소가 타고 있는 게 보였다.

밤늦게 양평 집에 돌아오니 예정보다 삼일이나 일찍 돌아온 나를 아내가 놀란 얼굴로 맞았다.

"아니 어떻게 벌써 오세요? 삼일이나 남은 줄 아는데요. 무슨 일이 있어요? 갑자기 오시게요."
"서울에서는 데모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파출소를 습격해서 불을 지르고 야단들이에요.

그래서 앞당겨서 수료식을 하여서 왔어요. 교회와 송 목사님도 안녕하시고요."
"다 별고 없어요."
"아무래도 시국이 심상치 않아요."
"그래요?"

이튿날 아침 군청에 출근하니 조용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시국 일로 쑥덕거리고 공론이

분분하였다. 각지에서 연일 계속되는 데모는 급기야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8월 23일 장면내각이 성립되어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게 되었다. 가장 반가워한 사람은 송 목사님이었다.

나는 송 목사님을 찾아가 축하를 하였다. 송 목사님도 희색이 만연하였다.

4.19 학생 의거는 독재정권을 추방하고 민주주의를 출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장면내각이 출범하니 말단의 기관장들까지 모두 교체되어 체질개선이 진행되어갔다.

모든 행정이 종전과는 달리 민주 방식으로 쇄신하는 듯 하였다. 군수가 바뀌고 중간 관리 자인 내무과장,

산업과장도 경질되었다. 협찬단체장까지도 어용인사라하여 교체 작업이 진행되었다.

업무개선에 따라 사무가 무질서하게 폭주하였다. 민원업무가 가장 많은 나는 개선책을 강구하느라 분주하였다. 어느 날 여운홍 선생의 비서인 황 근 동지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바쁜데 황형이 어떻게 내려왔어? 그간 별고는 없고..."
"김형을 좀 만나보려고 어제밤 차로 내려왔지.

김형 새로 부임한 김유경 군수님 어떠하셔? 참 좋으신 분인데 그분의 고향이 단월면인데..."
"너무 인자하시고 선비가 되어서요. 현대의 행정책임자는 어느 정도 파워 기질이 있어야하는데 너무 얌전하신 것 같아서..."
"과거에 여군수나 이 군수에게 협조하듯 김우경 군수에게 잘 보필하게."
"내가 능력이 있는가 잘 보필하라니 그런데 황형이 어떻게 김 군수를 잘 알고있는가.?
"경기도 교육위원회로 영전하기까지는 양평교육구청에 근무하셨어요, 그때부터 가까이 지내왔지."
"그래요?"
"어제 저녁에 김 군수 님을 찾아보고 영전축하를 하였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에 현재 직원 중에 누가 제일 심덕이 착하고 유능하며 신망이 있느냐 하기에 즉시 김형을 소개하였네."
"유능한 직원이 많은데 하필이면 왜 나를 소개하였는가?"
"사실대로 말 한 것뿐일세. 김형 외에 또 누가 있는가?"
"행정계장, 농정계장 다 유능한 사람들 아닌가."
"그들은 행정능력도 있고 관내에 지면인사도 많고. 하지만 순수성이 부족해... 김 군수님은 진솔하고 참신한 사람을 찾는 것 같아."
"무슨 업무를 맡기려고 하시던데..."
"그것은 나도 잘 모르지. 지휘관은 누구나 마음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믿음직한 보필자가 필요한 것일세."
"그러하겠지."
"김우경 군수님이 부탁하면 거절하지말고 잘 협조 보필해요."

황 근 동지는 김우경 군수를 잘 도우라고 신신당부하고 돌아갔다. 황 근 동지가 다녀간지 일주일 후였다.

유공열 행정계장이 고향으로 전출되고 후임으로 내가 행정계장으로 전보되었다.

행정계장의 직무는 행정능력이 우수하며 오랜 경력이 있어야 하는데 별로 경력이 없는 내가 발탁된 것이다.

 

김우경 군수는 발령장을 교부하면서 "김 계장에 대하여는 황 근 동지로부터 자세히 듣고 여러 직원들의 여론도 청취하여 보았소. 나도 뜻 한바 있어 행정계장으로 보직하였으니 나를 도와서 성심성의 직무에 충실하여 주기 바래요. 특히 어려운 때이지만 각 면 행정을 잘 지도 감독하여 모범적 군정운용을 하도록 힘을 써주기

바라오. 현실적으로 애로사항이 많을 것이요. 주저 없이 소신껏 직무를 수행하여 주기 바라오."
하고 당부를 하였다.

나는 최선을 다하마고 약속을 하였다.
4.19 혁명후 첫 행정개선사업이 부패의 원인이 되는 부정 공무원의 처단이었다.

그간 누적되어왔던 모든 부정공무원을 색출하여 엄단하라는 상부지시가 매일 하달되니 가장 어려운 행정조치였다. 축첩공무원, 부정축재자, 비위공무원, 민원의 대상공무원등을 세밀히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지시였다. 지방공무원으로서 지탄을 받을 만한 축재자는 관내에서는 다행히 한사람도 없었으나 면장 한사람과 직원 두사람이 축첩자라는 경찰 통보가 왔다. 경찰의 조사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해당 면장을 만나보았다.

"민주당 정부가 수립하여 좋다하였는데 축첩자로 숙청을 당하니 억울하기도 하고 참담한 심경입니다."
"소실을 정리하면 되지요."
"십 여년 이상을 같이 살던 사람을 도의적으로 하여금 어떻게 헤어집니까?

공직을 오히려 그만두는 것이 낫겠죠."
"결단을 하시기가 쉬운 것은 아니겠죠.

상급기관에서 지시가 있을때까지는 기다려 보겠습니다. 특별지시가 곧 있을겁니다."

면장의 입장을 고려하여 곧 인사행정 처리를 하지않고 유보하였다. 김우경 군수도 그와 아는 처지라 그런지 유예한 것을 양해하였다. 그러나 경찰서장은 매일 찾아와서 인사조치 결과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독재가 물러갔으니 모든 행정을 민주적으로 처리해야하는데 그러자니 애로사항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민원관계에 있어 경합되는 사안에 대하여는 법령이나 사리에 있어 옳지 않은것도 민주시대인데

왜 민원을 들어주지 않느냐면서 항의할 때에는 난감하였다. 슬프게도 매일 보도되는 라디오나 신문기사를

보면 과연 이 나라가 민주국가로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권력구조로 인한 대통령과 국무총리, 민주당내의 신구파, 계파간의 당쟁으로 인한 갈등은 온 국민을 분노케하여 규탄의 목소리가 높아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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