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16] -회전의자 편-

2008. 12. 24. 00:35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16]


회전의자

1962년 8월 1일, 도청에 첫 출근을 하였다.

이날은 나 외에도 첫 출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부임 신고식 때 새로 부임한 직원들에게 도지사가 이런말을 하였다.

"이번의 양정과 인사이동은 혁명이후 처음 있는 대폭적인 인사이동이었소. 금번의 인사이동은 양정과 직원들의 부정행위로 인하여 이십일명중 한사람만 유임되고 전원 교체 되었소.

현재 몇 사람은 경찰서에서 구속조사중이고, 그외 사람들은 파면 또는 시군으로 좌천조치하였소.

그러므로 현재 양정과의 업무는 공백상태로 애로가 많이있소.

금번 양정과직원을 보충함에 있어 여러 가지로 애로가 많았소. 양곡관리 업무에 있어 가장 중책을 담당하는 계장은 도본청 및 시군에서 가장 유능하고 신망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임명하였는데 바로 포천군 산업과장이요.

김정빈계장은 독실한 크리스찬이라 믿음으로 업무를 잘 수행할 것을 믿소. 앞으로 양정과는 김정빈관리계장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해서 맡은바 임무를 열심히 해 줄 것이라 믿소, 물론 다시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요. 이상."

도지사의 훈시를 듣고보니 믿는자로서 태도를 반듯하게 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한 발 잘못 내디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게.

내가 부임하기 전의 양정과는 감사원의 특별감사에 의해 된서리를 맞았다.

업자로부터 오백원짜리 점심한끼를 접대 받은 것 까지 적발해 내었다고 한다.

직원 21명중 양제계 차석만이 유임되고 그외는 전원 형사처벌 또는 인사조치를 당하였으니 새로 부임한 직원들은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뇌물에 강한 나도 혹여 작은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신경쓰며 직무에 임했다.

부임한지 2주가 지난 어느날 책상위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욕설이 쏟아졌다.
"개새끼야 왜 군량미를 보내주지 않았어?

일선 장병들을 몽땅 굶겨 죽일 작정이야? 너 총살을 당해 볼래?"
불문곡직 쏟아지는 욕설에 분노보다 당혹감을 먼저 느끼며 물었다.
"누군데 말을 함부로 하시오?"
"잔말말고 군량미를 어떻게 할거야."
"여보시오. 말 좀 삼가하시오! 처음 통화하는 사람에게 이럴 수가 있소?"

참다못해 언성을 높이니 그제야 설명을 한다.
"나는 중부전선00보급소장인데 군량비가 예정대로 입고되어 있지않소. 누가 책임을 지겠소?"
"내가 부임한지 몇 일 되지않아 자세한 물동수송 상황을 아직 확인 못하고 있으니 곧 파악한 후 바로 도착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요."
"오일 이내로 도착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죄로 군법회의에 고발하겠소."

군법회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군량미라니 급히 처리 해 주어야 할것 같아 발벗고 뛰어서 해결을 해주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같은 이런 전화를 몇 번 받고 나니 기분은 착 가라앉았다.

전시후의 공무원 월급은 호구지책에 불과할 정도의 박봉이었다.

경제적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포천에서는 초라한 관사라도 있어 살만 했는데 서울은 달랐다.

양평집을 처분하여 생활비에 충당할 형편이었으니 겨우 면목교회 뒷골목에 있는 작은방 두 칸을 얻었다.

이 집주인 내외는 들어가며 나가며 잔소릴 했다. 셋방사는 주제에 웬 짐이 그렇게 많으며 아이들이 왜 그렇게 많으냐는 것이다. 집 없는 설움에 잠긴 아내는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

짐이라야 극빈자들이 다 가지고 있는 취사도구와 작은 찬장 하나, 반다지 하나, 책상 하나가 다인데 짐이

많다니, 하긴 집의 규모에 비하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한 살,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 고만한 나이로 철없는 딸이 네명이었으니 아이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빈정거림에 내 속이 많이 상하였다.

그러니 아내야 말 할 것도 없었다. 밤늦게 귀가해보면 아내의 눈시울이 항상젖어있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의 비극이요 또한 없는 자의 삶이구나 싶었다.

 

나는 생각 끝에 그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토담집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 집도 한 달도 못되어 집주인이 철거하고 새로 건축한다고 비워달라고 해서 또다시 상봉동 논가운데, 십여체의 판자촌이 있는 내촌마을로 이사하였다.

 

하루는 시골 계시는 아버지께서 올라오셔서 집을 둘러보시고 너무도 초라한 집에서 아이들하고 법석거리며 사는 것을 보시며 한탄하셨다.
"남들은 너같은 위치에 있으면 벌써 큰 집을 마련했을 것이다.

도청의 좋은 자리에 있으면서 반듯한 전셋집 하나 마련 못했느냐? 봉안에서는 네가 크게 출세할 것이고 돈도
잘 벌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봉급이 적으냐?"

그 당시 내 동료들은 모두 큰 집들을 한 채씩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시고 내게 실망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십분이해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곤고한 생활을 해도 하나님께 부끄러움없는

생활을 하자는 나의 생활신조를 하나님께선 아실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큰 위로로 삼았다.
서울 상봉동 논 가운데 들어선 내천 셋집은 비가 많이 오면 논들이 바다로 변하였다.

큰 비가 오면 집이 침수되어 대피를 해야 했다.

늘 불안하였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교회의 반 목사님이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십 팔평 가량의 채비지 땅과 집이 있으니 사라고 했다.

싼 가격으로 나온 집이라 하여 반 목사님을 따라 그 집으로 갔다.

 

이십여채의 토담집과 기와, 초가집이 엉켜있는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대한기독교장로회 면목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집앞에서 반목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 집입니다."
나는 출입문이라고 달린 가마니 거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전시후라지만 이래가지고서야 교회가 부흥발전 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반 목사는 거적문 앞에서 엄 목사를 찾았다.
"계십니까?"
"네 반 목사님이 왠 일이세요? 여기 까지 오시게요?"
안에서 가마니 거적문을 밀치고 나온 남자가 목사를 맞이하였다.
"엄목사님, 목사님 안녕 하세요?"
"네... 별고 없어시죠?"
"엄 목사님 인사 하시죠."
"네, 누구 신데요?"
"김정빈 장로님이라고 경기도청 양정과에 근무하십니다 저기 내천에서 살고 계시는데 이 집을 사시려고 보러 오셨습니다."
"아, 그러세요 엄 목사입니다."
"저는 김정빈입니다."
"엄 목사님, 신축하시는 교회는 준공이 되었습니까?"
반 목사의 물음에 엄 목사는 삼일후면 신축교회가 완공이 된다고 대답했다.

신축하는 교회가 있기에 이 교회를 팔려는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엄 목사가 내게 말했다.
"집 앞으로 큰 길이 나니까 지금 매입해 두시면 투자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반목사도 권하였다.
"장로님 아무걱정 마시고 앞날을 보시고 사세요."
장마 때마다 집이 침수 당하는 괴로움에 시달리던 나는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이만원내고 구두 계약을 하였다. 집에 와서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니 참으로 반가워하였다.

서울에 와서 열 달안에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한데다 가는 곳마다 환경이 열악하였으니 반가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 집에 식구들을 들이기 싫어서 대폭으로 수리를 하였다.

안방 앞의 봉당을 마루로 깔고 옆으로는 부엌을 만들었다. 벽도 백석회를 발라 보기좋게 꾸미고 창호지창문을 유리창으로 개조하였다.

앞마당에는 깊이 우물을 파고 마당 옆에는 방 한 칸을 증축하였다. 집을 깨끗이 꾸미고 입주하던 날 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다시는 이사할 염려도 없고 아이들이 남의 눈치를 보 지 않고 마음대로 뛰어 놀수 있게 되었소,

비록 토담집이지만 내 집이 생겼으니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고요히 잠든 아이들을 보니 나의 집이라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안식처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한편으론 아직 내집 한 칸없이 셋방살이를 하며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이웃 주민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들의 아픔을 누가 해결할 것인가. 가슴이 저릿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