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 [17] -배신자 편-

2008. 12. 24. 00:36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 [17]

 

 

아내는 늘 잘 참고 이해해주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

나는 가끔 공연한 일로 아내에게 역정을 내곤했다.

어느 날 밤늦게 집에 들어와 보니 쪽 마루 끝에 쌀 한 가마니가 놓여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요 왠 쌀가마니요?"
"어느 분이 쌀가마를 지고 와서 내려놓으면서 이 명함을 두고 갔어요."

"이러한 것을 받지 말라고 수차 말을 하였는데 도 또 받아요?"
"아무리 안 받겠다고 해도 심부름 온 것이라 어쩔수 없다면서 두고 가는 걸 어쩌겠어요"
"당신이 받았으니 머리로 여다 주던지 저다 주던지 내일 아침에 가져다 줘요!"
"그것을 내가 어떻게 여다 줘요?"
"못 여다 줄걸 왜 받아요? 하여튼 내일 갖다 주어요."
사실 아내도 어쩔수 없이 받은 것이란걸 알면서도 나는 역정을 내었다. 절대 뇌물따위엔 손대지 않게하려는 심정에서 그런 것이다.

나는 쌀가마니를 뇌물로 준 사람에게도 역정을 냈다.
"차후에 또 다시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장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갔으나 더러는 불만스런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뭐 그리 별스럽게 구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직원들에게도 양심에 가책이 되는 행동은 삼가라고 수시로 경고를 하였다.

얼마후 나는 양평군 산업과장으로 전보발령 되었다.

전에 근무하던 지역으로 또 다시 보내는 인사 조치에 황당했다. 전임지로 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되지 못한다. 특별한 사유가 무엇일까? 마음이 찜찜할 뿐이었다.

양평군 부임 후 산업과 전 직원들이 모여 간단한 환영회를 열어주는데 좌중을 둘러보니 대부분의 계장들이

나보다 년 령이 높은 고참자 들이었다. 양정계 신 계장은 지금까지도 승진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신 계장은 내가 처음 양평군 양정계에 부임하였을 때 차석으로 있었다.

그의 당.숙직을 대직하여 주었던 것과 온갖 심부름을 다 해준 기억이 생생한데 그의 직속 상관이 되고 보니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인생의 길은 그렇게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양평으로 또 다시 온 식구가 이사할 처지가 못되어 두 시간 반이 소요되는 먼 거리를 매일 서울에서 출퇴근

하였다.

아침 출근은 별로 애로가 없었으나 퇴근시간은 늦은 퇴근으로 인해 고충이 많았다.
어느 듯 양평으로 출근 한지 일년 삼 개월이 지났다.

육십 오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나는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삼일간 병가를 내고 쉬고 있자니 같이 출퇴근 하던 홍 면장이 농정계장과 함께 집으로 찾아 왔다.
"과장님 영전을 축하합니다."
"영전이라뇨?"
"김 과장님 그 동안 병가를 내시고 도청으로 영전하시려고 교섭하려 다니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영전이라니."
"상공과 중소기업 계장으로 발령 나았다고 오늘 전문이 왔습니다."
"상공과로?"
"상공과라면 좀 매력있는 자립니까?"
그의 말뜻은 중소기업 사장들을 많이 상대하니 뇌물이 많이 들어오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런 것에 염증을 느끼던 참이라 단호하게 말했다.

"공무원이 좋은 자리 나쁜자리가 어디있오!"
아내는 나의 영전을 매우 기뻐하였다. 이제는 새벽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13. 배 신 자?
중소기업육성에 있어 중요한 업무가 있었다. 미군부 연한이 (? 뭔 뜻인지모르겠음) 되어 폐차되는 차의

주요 부품을 모아 조립한 후 차적을 등록하여 전후 교통수단으로 운행하는 임시제도였다.

찝차와 트럭이 주로 조립되었다. 조립공장은 부평에 있는 한국자동차 공장이었는데 과거 자동차를 수리하던 써비스공장이었다. 매일 도에 출입하여 조립등록업무를 담당하던 한국자동차공장의 조 전무가 내게 찝차

구입을 권하였다.

"김계장님, 찝차를 한 대 조립구입 하시면 저렴한 가격으로 차를 마련하실 수 있으며 나중에 팔아도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이 아니고 정당하게 차를 마련하는 것이니 해보시죠. 차대의 실비 값인

이십 오원만 주시면 됩니다. 요즈음 많은 공무원들이 찝차를 조립 구입하여 소유하고 있습니다."
한 대만 구입하여 팔아도 이삼십 만원의 이득을 본다는 그의 말에 구미가 당기었다.

생활의 위협을 느낄만큼의 박봉에 시달리던 때였다. 그날 밤 마침 광주에서 아버지께서 상경하시었다.

나는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 찝차를 한 대 조립구입 하려고 합니다. 이십 오만원만 준비해 주십시오."
"그만한 돈이 어디 있니."

"잠시동안만 융통해 주십시오. 찝차를 조립 구입하여 팔면 이삼 십 만원의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말은 쉽지. 그렇게 이득을 볼 수 있겠니?"
"조립등록 업무를 제가 직접 취급하고 있습니다. 실수는 없습니다. 약 두달 만 이용하도록 구해 주십시오."
"틀림이 없다면 주선해 보자."
이튿날 아침 광주로 내려가신 아버지는 이십 오만 원을 준비해 가지고 삼일후에 올라오셨다.

자식의 부탁을 거절 못하시는 부모님이었다.
"집에 돈이 어디 있니? 하도 네가 부탁을 하여서 할 수 없이 봉안에 가서 두 달을 기한하고 빌려 왔다.

실수 없이 하여라. 기한에 꼭 갚도록 하여라."
"네 착오 없이 하겠습니다. 한달 이내에 찝차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호언장담을 아버지께 하였다.
그 때 아버진 육이오 동란 때 불에 탄 봉안의 집을 염가로 처분하고 광주로 이주하여 얼마되지 않은 밭농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께 부탁한 자금이니 얼마나 귀중한 돈인가.

찝차 조립으로 돈을 벌어서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자고 마음속으로 맹세하고 큰 기대에 부풀어 돈뭉치를 들고 출근을 하였다.
조전무는 등록완료까지 이주일이 걸릴거라는 말을 남기고 이십 오만원을 받아 갖다.

약속한 이주일이 가까웠다. 업무관계로 매일 사무실에 들리던 조전무가 말을 달리하였다.
"이삼일 더 걸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삼일 후 그는 또다시 사오일이만 더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며칠째 나타나지 않았다.

몹시 궁금하던차에 마포경찰서 형사가 찾아와서 차량취급 담당 김경춘의 책상 및 서류일체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조사하였다. 나중에 그의 말을 들은 즉 기가막혔다.

조전무가 여러사람으로부터 자동차 조립을 해 준다고 대금을 받아 착복하였다는 것이다.

기대가 산산이 파괴되자 허탈한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참으로 난감하였다.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을 뵈며 어떠한 방법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아버님의 부채를 정리할지 막막하였다.

목이라도 매어 자살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전무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조전무의 주소를 알려 주고 아내로 하여금 집을 찾아가서 생활상태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이튿날 휘경동에 있는 조전무 집을 다녀온 아내는 돈 받을 생각을 말아야겠다고 했다.

셋방하나 달랑얻어 생활을 하는데다 변변한 가재도구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궁핍한 티가 줄줄 흐르더라는 것이다.

본인은 구속되었고 사는 모양은 그 모양이니 무슨 수로 돈을 받을 것이냐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나니 하늘이

깜깜했다.

이제 아버님을 어찌 뵈오며 그 많은 돈을 무슨 수로 갚는 단 말인가.

그날 밤 잠을 못 이루고 누웠다가 자살할 생각을 다 하였다.

연탄불을 가지고 오기 위해 일어 난 나는 한없이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의 얼굴과 아내를 쳐다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살이 죄중에서도 가장 큰 죄라는 생각과 부모님께 더 큰 고통을 안겨 드릴 것이라는 생각도 내 마음을

고쳐먹게 하는 데 한 몫을 했다.
조전무는 사기죄로 시월의 징역을 살고 나왔지만 그가 사기친 이십 오만 원의 돈은 부모님과 우리 가정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돈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신 아버님께서 가끔 "너 때문에 우리 집이 이 꼴이 되었다"하실 때마다

나는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고 나로 인해 고통을 받으실 부모님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룰 때가 많았다.

불행한 일은 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청 앞에 있던 경기도청이 수원으로 신축 이전하였다.

면목동에서 수원으로 출퇴근 하게 된 것이다.

서울역에서 수원의 도청까지는 통근버스가 운행하였으나 교통이 혼잡한 아침에 서울역까지 가는 것이 쉬운 일이아니었다.

퇴근시간이 일정하지 않으니 퇴근하기는 더 어려웠다.

그렇다고 가족이 수원으로 이주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이개월 동안을 힘들게 출퇴근하였다.

 

어느 날 밤 나는 아내에게 "여보 수원으로 출퇴근하기가 참으로 힘이 들고 귀중한 시간을 노상에서 다섯 시간 이상 허비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요."히고 말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니예요."
"아무래도 도청을 그만둘까 하오."
"아이들하고 직장까지 그만두시면 어떻게 살아요? 대책을 세우고 그만 두어야죠."
" 현재로서는 무슨 대책이 있겠어요?"
" 기업체라도 들어 가야죠."
" 들어갈만한 기업체가 있겠어요."
" 찾아 봐야죠."

그날 밤 아내와 더불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니 나 자신이 너무 처량한 인생이요 무능한 남편이요 아버지라는 것을 자인 할 수밖에 없었다.

조반석죽을 못 면하는 빈궁한 삶을 살아도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삶은 살지 말자는 생활신조를 지닌 사람이 공무원의 박봉으로 남들처럼 잘 살기는 애초에 그른 일이었다.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얼마 후 인천에 있는 연합산업회사의 최사장이 찾아왔다.

내가 공업계로 이동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다.
" 골치 아픈 공업계로 오셨군요. 이제 공직을 그만두시고 저와 같이 사업을 해 보시는 것이 어떠 하실는지요. 그 동안 계장님께서 우리 회사를 위해서 많은 협조를 하셨는데...공장 신축도 완성되어가고 곧 준공식을 하려고 합니다. "
연합산업회사는 주로 수출용장갑을 생산하는 수출업체였다.

그 동안 소규모로 가동하였으나 재정자금 지원을 받아 공장을 증축하고 시설을 확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