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19] 개척교회를 세우고

2010. 4. 11. 19:30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19)

 

 

개척교회를 세우고

조 전무에게 사기를 당한 직후, 사단은 절망에 빠진 나를 유혹했다. 교회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달에 한두 번 빠졌고 나중엔 한 달에 한번 겨우 나가다가 그나마도 안 나갔다.

그래도 전혀 죄의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3년의 세월을 하나님을 떠나서 무의미하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저녁, 아버님께서 상경 하셨다. 아버님은 나의 신앙상태를 보시고 엄히 책망하셨다.

"우리 가정은 대대로 신앙으로 사는 가정이다.

네가 장로까지 되었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망각하고 교회를 제대로 나가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

그래 가지고 복 받고 잘 살기를 바라고 출세를 하겠다는 것이냐?  어려서부터 이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온 네가 아니냐."

 

아버님의 책망은 잠자고 있는 내 신앙의 뿌리를 흔들었다.

팔공산 전투 때 살려만 주면 할머니와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며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를 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생각하니, 또 나를 위해 흘린 할머니의 눈물을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러웠다.

아버님의 책망으로 인해 정신을 차린 나는 집에서 가까운 중량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 교회에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평교인으로 봉사하고자 하였으나 목사님이 극구 권하셔서 협동장로로 봉사하게 되었다.

 

나는 예전의 열심을 되찾아 전심전력으로 교회에 봉사하였다.

장년들에게 공과를 가르치고 청년부와 중 고등부를 지도하는 한편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했다.

아내도 여전도회 성가대에 들어가 열심히 주의 일에 앞장섰다.

주의 일은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고 재미가 있어서 더 열심히 뭔가를 하고 싶어서 애달아했고 “다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으련다.”

하고 거듭 맹세를 하곤 하였다.

아무리 바빠도 새벽기도회에는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이 때에 생긴 일로 안 잊혀지는 사건이 있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각자 개인 기도를 하는데 귀신들린 여인이 가슴에서 비수를 꺼내들고 칼춤을 추며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마루바닥을 쿵쿵거리며 뛰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보다 못한 목사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고함을 치시고 놀란 교인들은 밖으로 뛰어 나갔다.

여인은 울고 웃고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교회 안을 뛰어다녔다.

나는 목사님을 도와 여인을 잡아 밖으로 내 보내려 하였으나 여인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밖으로 뛰쳐나간 여자신도들이 문 뒤에 숨어 교회 안을 들여다보는 가운데 목사님과 나는 힘을 다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인이 들고 있던 비수를 마루바닥에 던지고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울던 여인은 칼을 주워 가슴에 품고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목사님께 물었다.

“목사님 저 여인이 누구입니까?”

“휘경동에 사는 경찰관 아내인데 가정이 화목하지 못해서 싸움이 잦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믿음으로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는 듯한데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데다 학대가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한동안 낙심해 있더니만 귀신이 들려서 저리되었습니다. 김 장로님 오늘 아침 수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을 위해서 우리 열심히 기도합시다.”

다음날 새벽기도회부터 나 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도 귀신들린 여인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였다.

기도의 힘에 눌린 사탄이 여인에게서 손을 떼었는지 여인은 새벽마다 열심히 나와서 예배를 드렸다.

참 잘되었다 했더니 부활절을 맞이하여 청량리지구 전 교회가 연합으로 경희대학교 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는데

문제의 여인이 설교하는 강당에 뛰어 올라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탄의 예배방해였다.

이렇듯 사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역사 한다. 때로는 가정을, 때로는 교회를 파탄에 빠뜨리는 사탄을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는 공직에 있을 때 뇌물로 내 신앙의 양심을 시험하는 사탄에게 절대 지지 않았으나 사기를 당하였을 땐 낙심하여 그만 교회를 멀리하였다.

몸과 마음이 피곤에 지쳐있을 때, 낙심해 있을 때 사탄의 힘은 보다 강하게 역사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성도는 고통 중에 있을 때도 감사할 줄 알아야한다.

환난과 재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을 믿고 그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고통 중에서도 감사와 찬양이 나오는 법이다.

감사와 찬양은 사탄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사탄은 또 교회를 흔들어대기도 한다.

69년 12월 크리스마스 직후였다. 신동훈 집사 집에서 중량교 교회 재정위원들이 신년도 예산 편성을 위하여 모였다.

장로는 물론 남자 집사들도 거의 다 모였다.

목사님은 신년도 목회방향만 제시하고 사례비를 심의 할 때에는 퇴석하였다.

사례비를 심의 할 때에 내분이 일었다. 갑자기 김선환 목사를 사임케 하자는 말이 나왔다.

박력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에 맞서 그런 이유로 목사를 내어 쫓는 일은 도리가 아니라는 의견이 나왔지만 사임케 하자는 쪽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이쪽저쪽 말을 다 듣고 있다가 말했다.

“목사님 시무문제는 지금 논의할 문제가 못 됩니다. 목사님을 모시지 않으려면 늦어도

가을 노회가 있기 전에 노회의 허락을 받아야하며 가실 곳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추운 동절기에 대책 없이 목사님을 가라 말라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내 말이 끝나자 다른 장로들이 앞 다투어 말했다.

“그것은 김 장로님께서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실은 김 장로님이 오시기 전부터 다른 교회를 물색해 보시라고 권하여 왔습니다.

그런데도 오늘까지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수차 종용하여 왔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언제 교회에서 정식으로 종용하였습니까?”

“몇 사람이 그러한 뜻을 가지고 이야기 한 것뿐이죠. 그 동안 목사님께서 건축하시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하셨습니까?

크게 실수하신 것도 없으신 분을 다른 곳으로 가시라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교회의 상황을 보세요. 교회가 전연 부흥되지 않고 늘 이 상태가 아니요.”

“목사님은 마음만 좋고 박력이나 추진력이 없을뿐더러 설교의 은혜도 없어 청년들이 날로 감소하는 상황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좀더 패기 있는 젊은 목사님이 필요합니다.”

패기 있는 젊은 목사가 필요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예산 편성만을 속결하자고 강권하였다.

주의 사자를 교회 밖으로 내모는 일은 하지 말아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교인들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주의 사자를 길거리로 내 몰아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교인이라면 주의 사자를 공경하고 어려워 할 줄 알아야 하며 잘 모셔야 할 것이다.

결국 그 날은 아무런 결정 없이 해산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1970년 3월 하순경 같은 교회 방영환 장로, 최숙자 집사, 박신희 집사 세 분이 날 찾아왔다.

교회부근에 좋은 주택지가 있으니 세 사람이 구입을 해서 집을 건축하자는 것이었다.

우리 집을 팔면 택지 구입비와 건축비까지 충당이 된다는 말에 선뜻 동의를 하였다.

한 달 후 아담한 이십사 평의 붉은 벽돌집을 지어 이사를 하였다.

한 달여 동안 이 집을 건축하느라고 아내가 참으로 눈물겨운 고생을 하였다.

이 무렵 나는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친구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보수야 받던 말든 맡은 일에 소홀히 할 수 없어 집을 지어도 거들지를 못하였다. 아내는 혼자 공사비 마련하랴, 자재 구입하랴, 공사 감독하랴 사방으로 뛰며 잡역의 중노동까지 하여 손끝 발끝이 부르터 피를 보는 게 예사였다.

 세 집중에서 우리 집이 제일먼저 입주하였다.

입주하던 날 밤 하나님께 입주 예배를 드렸다. 아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여보 참으로 고생 많이 하였소. 당신의 피땀 흘린 수고가 이와 같이 아름답고 행복한

안식처가 건축되었으니 진심으로 감사하오.”

“그것을 아세요? 벽돌하나 들어보지 못한 분이.....”

“참으로 면목이 없소.”

“어쩌면 아내가 동분서주하면서 인부들과 싸우며 공사를 하는데도 삽자루 한번 들어보지 않아요? 너무했어요.

나도 오기가 나서 당신에게 도와달라 하지 않았어요.

새 집에 들어와서 이렇게 살게 되니 참으로 좋으시죠 또 미안하시죠?“

“미안하오. 근데 새 집에서 살게 되니 좋기는 하나 모자란 건축비를 어떻게 할는지 걱정이 되는구려.”

“이러한 때 인천 최 사장이 우리 돈을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최 사장으로부터는 아무연락도 없죠?  최 사장이라는 사람도 너무나 무심한 사람이고

당신도 남 좋은 일만 하고 있으니 .......”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소?”

“자재대금을 다 주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하죠?”

큰일이었다. 예상대로라면 살던 집을 팔면 건축비까지 다 해결이 되는 것이었으나 집을 팔고도 돈이 많이 모자랐다.

건축비가 예상했던 금액의 배 이상 들어간 것이다.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해 보고 되지 않으면 집을 담보로 해서 융자받아 정리해야죠.”

앞집의 박 집사나 뒷집의 방 장로도 우리와 다른 처지가 아니었다.

죽을 수에 집을 짓는다는 속담이 있더니 꼭 그 모양이었다.

완전한 자금 확보 없이 건축을 시작 한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를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내 사정이 이렇듯 딱한데 교회까지 목사님 거취문제로 시끄러웠다.

김 목사님의 난처해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주의 사자를 그렇게 딱한 처지로 밀어부쳐 놓는다는 게 나로선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지경이지만 교회를 개척하여 목사님을 모시고 나가는 편이 옳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