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 [18] -15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2010. 4. 2. 22:48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 [18]


 

“더 연세 드시기 전에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다져 놓으셔야지요. 현실적으로도 서울 면목동에서 매일 수원으로 출퇴근하시는 것도 많은 고충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회사로 오십시오.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공무원하던 사람이 기업체에 들어가서 무엇을 합니까?”

“계장님은 행정능력이 풍부하시니 우리 회사에 전무로 오셔서 회사를 도와주십시오.”

“글쎄요. 조금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수일간만 기다려 주시죠.

가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즈음 상공과에 근무했던 많은 직원들이 기업체로 갔다.

그들 중엔 간부직에 있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데리고 있었던 윤 서기도 부평 모 공장으로 갔고 김경춘은 수출 공단 임원으로 가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구토설사가 심하고 고열이 났다.

상봉동에서 개원을 하고 있는 사촌 매부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곧 큰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으라고 했다.

서둘러 휘경동 위생병원으로 가서 진찰한 결과 급성 장질부사로 판명되어 독방에 수용되었다.

전염병이라 면회도 엄격히 통제되었다. 그런데 병의 정황도 모르고 문병온 당숙모가 와서 불쾌한 한마디를 남기고 갔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시골에서 땀 흘려 고생하고 있는데 감기가 좀 들고 고열이 난다고 해서 돈이 많이 드는 독방에 육신 편하게 누워 있으면 어찌하나.

팔자 좋게... 시골에서 고생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해야지.”

할말이 없었다. 뼈 맺히는 말이었다.

아내는 나보다 더한 심정인 듯 울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는 장질부사 환자요 하고 소리치며 광고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십여 일간의 입원치료비도 우리를 슬프게 했다.

병원에 지불할 입원비만도 3 만원이었다. 봉급 생활자로선 거금이었다.

이웃집에서 2만원을 빌려 퇴원을 했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치료비조차 없어 남의 돈을 빌려야하니. 아이들은 성장해 가는데 어떻게 살아가야죠?

참으로 한심한 삶이에요.”

“두루 미안한 것 뿐이요. 가장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서 미안하오.”

내 마음은 가시방석 위에 앉은 듯 했다.

미안하고 참담했다.

“앞으로 어떠한 대책이라도 있어야지 이대로는 살아 갈 수 없지 않아요.

참으로 암담하고 막막하네요.”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철없이 누워자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앞으로 저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을 시킬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 때 전무로 취임하여 달라는 최 사장의 요청이 떠올랐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공직을 그만 두고 전직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 현재와 같은 경제적 빈곤은 면할 수 있겠지....내 마음이 굳어졌다.


67년 9월 중순, 사직서 한 통으로 15 년간의 공직에 마침표를 찍었다.

허전하고 착잡한 마음을 달래며 인천연합산업회사에 전무로 취임을 하였다.

인천연합산업회사는 공장건물도 완성하고 기계시설도 자동으로 완비되어 활발히 가동되고    있었다.

그런데 2개월도 채 못되어 운전자금 부족으로 원자재조차 원활히 확보 못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최 사장이 내게 고충을 하소연하였다.

“전무님이 도 재직 시에 정부재정자금을 지원해 주셔서 보시는 바와 같이 공장이 확장

건축되어 가동되었으나 운전자금이 부족하여 원자재를 확보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 동업조건으로 담보를 제공하여 원자재 및 운전자금을 제공해 줄 분이 있으면 천거해 주십시오.

가급적 속히 구해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꼭 동업자가 필요합니까?”

“현재로선 속수무책입니다.”

“이러한 때에 신용보증제도가 있어 무담보로 융자를 해주면 운영에 애로가 없을 터인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런 제도가 없어 중소기업이

애로가 많아요”

“그 동안 약속된 동업자가 있어 그를 믿고 기계시설을 확장하였는데 그가 갑자기 가정사정으로 인하여 출자를 못한답니다.

현재로는 인건비조차 조달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면 다른 대책이 전연 없습니까?”     

“이곳 출신 국회의원이 적극 협조하고 있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네요.”


실망이 컸다. 기업체에 투신하여 보람 있게 살아 보려던 것이 불과 석 달도 못되어

꿈으로 사라질 지경이 되었으니.

최 사장과 함께 동업자를 물색하러 쫓아다녔으나 허사였다. 심지어 화성군 출신 손도심 전 의원과도 인연을 맺어 출자단계에 이르렀으나

신병관계로 입원하게 되어 좌절되고 말았다.

나는 우선 활동자금이라도 충당하기 위하여 퇴직금전액을 회사에 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아내는 내 말에 펄쩍 뛰었다.

“퇴직금을 그렇게 하였다가 만일 잘못 되어서 한 푼도 받지 못하면 그 땐 어떻게 해요.”

아내가 극구 만류하는 것도 뿌리치고 나는 내 퇴직금 전액을 회사에 넣었다.

전무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주인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    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일로 나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했다.

몇 달을 쫓아 다녀도 동업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회사의 사정은 나빠만 갔다. 최 사장도 지친 듯 우울해 보였고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바라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김 전무님 참 미안해요.”

나는 내게 미안해하는 그를 보는 것이 더 미안했다. 그를 편안하게 해주는 일은 내가 사임을 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사표를 냈다.

“최 사장, 내가 있는 것이 오히려 회사에 부담이 되는 듯한데 내가 사임을 할 터이니 유능한 사람을 구하여 재기하도록 하세요.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을 것이니 이 사표를 받으세요. 그간 수고 많이 하였소.”

“도청에 잘 계시는 분을 모셔와서 이렇게 되었으니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는 것 있나요. 매사가 다 그런거지요.”

“사임하시면 투자금액을 즉시 반환해 드리는 것이 도리인데 지금은 그러한 형편이 못되고     어떻게 하죠?”

“빌려 드린 금액이 얼마 되지 않으니 공장이 가동되면 조속히 반환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내자 보기가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가급적 속히 반환하도록 하겠습니다.”


1968년 8월 2일 밤은 내게 가장 고독한 밤이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하자 아내는 멍하니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기가 막혔을 것이다.

조 전무에게서 받은 상처가 가시지 않은 터에 또 크나큰 절망을 안겨줘야 하는 나의 심정은 뭐라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자꾸 나쁜 일만 생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생각하니 답이 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