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예수병원과 선교사 묘역, 전주 서문교회, 전동 성당, 금산교회를 보고.....

2019. 4. 8. 23:21교회,신앙생활

지난 토요일(4/6), 아내와 동부노회 국내 선교지 탐방팀과 함께 전주 예수병원과 선교사 묘역, 전주서문교회, 전주한옥마을, 전동 성당, 

금산교회를 탐방하는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을 하시다가 짧은 생을 마치셨던 선교사님들의 사역들을 가이드로부터 듣고 묘역을 둘러보면서 얼마나 감동이 되었던지요.

묘역에서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제안에 따라 찬송가 387장을 불렀는데 목이 메어서 옳게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선 아내는 참다못해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기도 했습니다. 


특히 전킨 (William M. Junkin 한국명 전위렴) 선교사 부부의 사역과 짧은 생애와 선교사 묘역에 있는 비석과 그의 세 아이들의 무덤 표시석 앞에서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킨 사역 관련 기사-->http://www.iwithjesu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58)


43세를 일기로 소천한 전킨 선교사님을 보면서 나는 여지껏 무얼 했는지 되돌아보고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윌리암 맥클리 전킨 (William McCleary Junkin, 1865~1908) 선교사님은 7인의 선발대의 한사람으로 군산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며 군산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를 세웠습니다.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전주 서문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셨습니다.

전킨 선교사님은 1907년에 폐렴이 발병해 1908년 1월 43세의 나이에 전주에서 사망하셨으며 


부인 메리 레이번(Merry Leyburn, 한국명 전마리아)은 기전여학교 1대 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동영상 출처-->FCCNTV (전킨 선교사 편) 이 동영상을 꼭 보시기 권합니다. 




그 외에도 30세 처녀의 몸으로 이 땅에 선교사로 와서 아픈이들을 돌보며 전주 예수병원을 설립하여 초대 원장이 된 마티 잉골드(Dr. Mattie Babara Ingold) 선교사는 볼티모여 여자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분인데 모든 영광을 버리고 고생과 위험이 기다리는 이 땅에 선교사로 오기를 결심하고 5년동안 기도하며 준비했다니.... 더구나 당시 동학란으로 어수선했던 전주에 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번 전주 여행에서 이 두분의 선교사님을 알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


마티 잉골드 선교사가 30세 때 ,1897.7.18. 저녁 남캐롤라이나 록힐 장로교회  성도들에게  한 작별인사

https://blog.naver.com/teneye/220735747582  예수병원 블로그 


“갈 수 있다는 게 기쁩니다. 하나님이 이 특권을 제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경과 말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다면, 저는 그 땅에서 외롭게 살아갈 엄두를 내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성경, 성경의 명령과 약속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똑똑히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보다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더 큰 자극은 없습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912516


나에게 무엇이 닥칠 것인가에 대해 나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보호 하심 아래에 있다. 

내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게 하소서.

(1897년 7월 18일 마티 잉골드의 일기 중)  출처: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170619129700055




 록힐 제일장로교회 당회 회의록/ 자료 출처: 예수병원 블로그






아래 사진 잉골드의 기도_일기중 자료출처 선교한국 ---> http://www.missionkorea.org/?p=18060 




예수병원 의학 박물관에 들어가면 병원 설립 당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도록 사진과 설명들이 있다.

의료기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초대 병원장 잉골드는 처녀의 몸으로 조선에 와서 병원을 세웠다. 




잉골드 선교사의 왕진 모습,  자료출처 : 연합뉴스 







이번 탐방에서 특별히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은 윌리암 전킨(한국명:전위렴) 선교사 부부와 자녀들에 대해 듣고서였습니다.

43세를 일기로 소천한 그는 세 아이들과 함께 예수 병원 옆 선교사 묘역에 묻혔으며 아내 메리 레이번 선교사는 배속에 유복자가 있었으며 미국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묘역 울타리 안쪽에 앞줄 우측에서 두번 째 키가 낮은 비석이 전킨 선교사의 비석이다.



아래 선교사 묘역 안내판을 보면 B 묘가 전킨 선교사의 묘이며 그 앞에 직사각형 돌 세 개가 그의 아이들의 묘입니다.

I 묘는 마티 잉골드 선교사의 딸 ( 사산함 ) 이 묻힌 곳입니다.



전킨 선교사의 비석 세 자녀들이 아버지 곁에 묻혀있다.

큰 아들 조지(George, 1893~1894)와 둘째 시드니(Sidney, 1899~1899),

그리고 세째 프랜시스(Francis, 1903~1903)의 이름을 새긴 묘석이다.




전킨 선교사와 기전학교

   자료출처:위키백과

- 1900년 4월 24일: 미국 남장로교 최마태(Mattie Tate) 선교사, 소녀 6명으로 학교 시작

- 1904년 9월 1일: 전마리아(Mary Junkin) 선교사 초대 교장 

- 1909년 7월 29일: 전목사 긔렴여중학교(記全女)로 학교명을 정함, The W.M Junkin Memorial school for girls[1], 

                    이전에는 전주여학교(Chunju School for Girls)로 칭했음


   *위의 전마리아는 전킨 선교사 부인 메리 레이번 


자료출처:한국 기독교회사

기전여학교는 1909년 ‘전목사기념여중학교’라고 불렀다. 이는 1908년 전주에서 별세한 전킨 목사를 기념해서 붙인 것인데 

줄여서 ‘기전여학교’라 한 것이다. 

1909년 7월 29일: 전목사 긔렴여중학교(記全女)로 학교명을 정함, The W.M Junkin Memorial school for girls[1], 

이전에는 전주여학교(Chunju School for Girls)로 칭했음



위 사진 속 서문교회란 전주서문교회입니다. 아래는 전주서문교회.  

전킨 선교사님은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전주 서문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셨습니다.

그 후 입구에 있는 종각이 세워질 때 전킨 선교사님의 부인이 종을 헌납하셨다.





전주 서문 교회 종각



전주서문교회 뒷쪽 주차장쪽에서 바라본 교회당


전주서문교회는 전라북도 전주시 다가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 속한 개신교회이다. 

                                  미국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었던 정해원에 의하여 1893년에 설립된 호남지역 최초 개신교 교회이다.



개화기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과 선교 사업


1882522일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면서 그 동안 쇄국정책으로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기 시작해 같은 해 66일에는 한영(韓英)수호통상조약이, 630일에는 한독(韓獨)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1882723일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야기되고 난 후, 비록 일본의 침투와 압력 때문이었으나 1884626일에는 한이(韓伊)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188664일에는 한불(韓佛)수호조약을 맺게 되는데 특히 이 조약문 속에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기로 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프랑스 정부측에서는 천주교 박해 당시에 프랑스 신부의 순교가 있었음을 의식하고 조약문 안에 교회(敎誨)’라는 문구를 의도적으로 삽입해 신앙의 자유를 도모했다는 것인 데 외교에 생소한 조선 관원은 교회(敎誨)라는 문구의 본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조인했던 것 같다


한국 정부의 본 의도는 그 이후에도 기독교 선교 행위에 대해서는 강경한 억제 의사를 표명한 바가 있었다.


  18835월에 미국은 전년에 맺은 수호통상 조약의 비준서를 푸트 (Lueieus H. Foote, 福德) 특사가 가지고 와서 상호 교환하고 미국 공사관을 서울에 설치했다


초대 주한공사로는 특사로 왔던 푸트가 임명되었다. 한국 정부는 푸트 공사의 외교 관례에 관한 설명과 권유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에 견미사절단 (遣美使節團)을 파견하게 되었는 데, 단장 민영익 (閔泳翊)을 위시해 홍영식 (洪英植서광범 (徐光範유길준 (兪吉濬) 10여 명으로 조직되었다. 이들 사절단 일행은 1883716일에 제물포(濟物浦, 仁川)를 출항해 18839월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대륙 횡단 철도편으로 시카고·뉴욕·워싱턴 등지를 순방 여행하는 도중, 하루는 차 안에서 미국 북감리교의 가우처(John E. Goueher)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가우처 목사는 처음에는 그들을 호기심으로 대했으나, ‘한국의 마게도냐인이라는 이수정의 선교사 초청을 요구한 글을 읽은 바가 있었던지 한국 선교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들과 교제했고, 후에 뉴욕에 있는 감리교 해외선교본부 (Methodist Mission Bord)에 한국 선교의 긴급성을 주장하며 그 당시로는 큰 돈인 2,000달러를 보냈다. 연락을 받은 선교부는 당시 일본에 파송되어 있는 매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에게 알렸다


이 지시를 받은 매클레이 목사는 1884624일부터 78일까지 우리 나라를 방문해 2주간 체류하면서 이미 일본에서부터 알고 있던 개화파 김옥균을 통해서 탄원서를 고종(高宗) 황제에게 품신(稟申)했는데 그 내용은 미국 감리회가 한국에서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직접 전도와 선교 사업을 내세우지 않았기에 한국 정부는 이를 허락해 주었다.




(1) 의사의 신분으로 입국한 알렌 선교사

 

미국 북감리교회 가우처 목사가 견미사절단을 만난 후 순발력있게 한국 선교에 관한 일을 시도하였을 때 미국 북장로교회에서는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주재하고 있는 레이드(Gibon Reid)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내와 한국에 파송할 선교사를 물색 중이었고 이미 동양에 파송되어 중국 상해에 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48)은 친구 핸더슨(Henderson)의 권유로 한국에 갈 것을 지망하고 있던 중이었다.

 

알렌은 1858423,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에서 출생해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마치고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북장로교회의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을 받아 18831011일에 중국 상해에 와서 임지를 정하려고 머뭇거리고 있던 차에, 1884622일 선교부의 한국 파송 허락을 받고 914일 황해를 건너 9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한 다음, 22일에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우리 나라에 공식적으로 입국해 상주하게 된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문호를 개방은 했으나 기독교 선교에 대해 아직은 경색(硬塞)되어 있었으므로 입국 신분을 미국 공사관의 공의(公醫)라고 했다. 또한 영국·중국·일본 등 각국 영사관에서 공의 업무를 위촉받아 명실공히 의료 행위를 주무로 하는 의사로서 한국 정부의 묵인 아래 머무르게 되었다.

 

그가 서울에 자리잡은 지 두 달 남짓 되는 1884124,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발해 우정국 피로연에서 개화파의 칼에 찔린 근위대장 민영익(閔泳翊)이 빈사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14명의 한의가 동원되었으나 지혈하지 못하고 있었는 데, 그때 당시 통리아문(統理衙門)의 협판(協辦)인 묄렌도르프(P. G. von Möllendorf, 穆麟德)가 알렌을 주선해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고종 황제와 민비(閔妃)의 총애를 받아 어의(御醫, 侍醫)로 임명받았다. 그후 알렌은 의술로 나라에 크게 이바지했다 해서 정부로부터 세 번이나 훈장을 받았으며, 1885719일에는 참판(參判) 벼슬을 받게 됨으로써 한국 선교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18852월에 알렌은 병원 설립 허락을 받아 광혜원(廣惠院, Widespread Relief House, 뒷날 濟衆院으로 개칭)을 설립했는 데, 이것이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다. 병원을 통한 의료 선교 사업은 한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켰으며 복음 선교 사역의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그러나 알렌은 직접 선교 사역에 종사하지는 않았고 또 1887년에는 의료 선교 사역에서도 손을 떼고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 직원(서기)으로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의료 선교사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18958월에 주한 미국공사관의 정식 직원이 되었고 1897년에는 대리 공사 및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1901년에는 한국 주재 특명 전권대사로까지 승진했다. 정치에 가담한 그는 자연 선교 사역에는 소원(疎遠)해져 동료 선교사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1905년 알렌은 모든 일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났다. 비록 알렌이 처음 입국했을 때 신분을 공사관 공의로 했을지라도 선교사였던 그는 자기 어학 선생 이하영(李夏榮)을 전도했고 자연히 알렌 의사가 선교사란 소문이 나게 되니 고종 황제는 미국 공사 푸트에게 그 여부를 물은 바 알렌은 미국을 위시해 각국 공사관의 공의라고 답변한 바가 있었다.

 

이하영의 뒤를 이어 알렌의 어학 선생은 노도사(본명 盧春京)였는 데 그는 알렌의 집에서 한문으로 된 기독교 문답서와 신약 성경 낱권을 발견하여 탐독한 후 알렌과 신앙 문답을 했다. 결국 그는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886711일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국내 최초의 기독교 세례 교인이 되었다. 고종의 막중한 신임을 받은 알렌은 한국 정부의 눈총을 의식하고 선교 행위를 극히 신중하게 했으며 직접 선교하는 것을 삼갔다. 그러므로 선교 동역자 간에 오해도 받았다. 1900년 미국인들이 서울에 전차를 부설할 때, 한국인의 재산을 수탈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군부 대신 이근택(李根澤)과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 등이 판단하고 전차 이용을 금지하게 한 일로 인해 앙심을 품고 미국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일시에 살육하라는 밀령이 내려졌을 때 이 정보를 알게 된 알렌 대리공사는 고종 황제에게 상주해 그들의 목숨을 건지는 귀한 일을 했다. 이렇듯 그는 한국에 들어와서 직접 선교를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한국 선교 초기 선교운동에 큰 뒷받침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

 

미국에서는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대각성(大覺醒)운동에 의해 해외 선교 열풍이 일어났으며 각 교파에서는 해외 선교부를 두고 선교사 파송에 주력했는 데 이 때 신앙적이고 진취적인 젊은 신학도들 중에 해외 선교를 지망하는 이들이 속속 배출되었다. 또한 1880년에 시작된 전국 신학교연맹(Inter-Seminary Alliance)은 신학생들의 선교열을 구체적으로 조직화했는데, 언더우드·아펜젤러 및 남장로회에서 파송해 한국 초대 선교사가 된 신학도 등은 전국신학교연맹에 적극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1884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는 의사인 헤론(Heron)과 신학교를 갓 졸업한 언더우드를 선발해서 1884728일에 한국에 보낼 선교사로 임명했는 데,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와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亞扁薛羅), 앞서 중국에 파송되었다가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한국에 들어온 의료 선교사 알렌의 뒤를 이어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였다.

 

188545일은 부활 주일이었으며 한국에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정식 선교사로서 들어온 날이며, 직접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첫 발을 내디딘 날이다. 일본 요코하마 항에서 기선 츠루가마루(敦賀丸)로 출발해 부산을 거쳐 이날 제물포(인천)에 상륙했다. 이들은 한국 땅을 밟으면서 우리는 부활절에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이날 사망의 빗장과 무덤의 문을 산산이 깨치신 주여!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시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는 데, 이 말은 아펜젤러가 본국 선교부에 보고한 서신에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정세는 청···(···) 등 열강의 각축이 심해 살벌하고 삼엄한 분위기였으므로 미국공사관에서는 미국 여인이 상륙해 견디어 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아펜젤러 부부를 잠정적으로 일본에 되돌아가게 했다. 그들은 청·일간의 험한 분위기가 일단 안정되자 그 해 620일에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 스크랜턴(Mrs. Mary F. Scranton, 施蘭敦母親) 여사와 스크랜턴 의사 부인(Mrs. B. Scranton, 施蘭敦)과 더불어 한국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부 총무, 배재 학당의 설립자 및 교장, 연합교회 목사, 성경 번역 위원 등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1902612, 성경 번역 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작은 기선으로 항해하던 도중에, 목포 근해에서 선박끼리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그 선박에 동승한 이화 학당 여학생을 구출하려고 물에 뛰어 들었다가 익사하고 말았다.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언더우드는 사자처럼 당돌하고 여인처럼 우아하며 주님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는 열정의 감리교인 아펜젤러는 남을 위해 섬기다가 세상을 떠났다.”라고 말했다.

한편 장로회의 언더우드는 185971일 영국 런던에서 출생해 13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1881년 뉴욕대학을 마치고 뉴저지 주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경영하는 뉴브런즈윅(New Brunswick) 신학교에서 18811884년까지 문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그는 신학교 재학 중 인도 선교를 지망했을 뿐만 아니라 의학적인 소양을 쌓기 위해 1년간 병원에서 임상 실습도 했다.: 


자료 출처: 전주 서문교회 홈페이지http://www.i-seomoon.or.kr/page_GYXL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