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24. 18:56ㆍ칼럼
잊을 수 없는 연주회
-우리는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밤이면 차 뒤쪽 짐칸에 들어가 문을 안에서 잠그고 -
지난 11월 20일 사랑의 부부 합창단 정기 연주회가 대구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한여름 무덥던 한 달을 빼고는 매주 화요일마다 모여서 열심히 연습했던 곡들을 발표하는 정기 연주회 날이라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마지막 리허설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앞줄에 서 있던 아내의 머리를 보고 갑자기 울컥하고 목이 메어 노래를 잘 부를 수 없었다.
1년에 한 번 발표하는 정기 연주회 날이라고 여단원들은 머리를 이쁘게 올리고 어떤 이는 반짝이 스프레이까지 뿌리는 등 한껏 멋을 내고 곱게들 하고 왔는데 아내는 평상시 모습 그대로 서서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게 아닌가?
'2만 원이면 될 텐데 왜 그냥 왔노? 하기야 여기 오기 직전까지 일해야 했으니, 머리를 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나.....'
여러 생각으로 가득 차서 내 귀에는 지휘자의 설명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좀 꾸미고 오지 않고......‘
아내는 나를 만나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시집오자마자(화장품 대리점을 하던 때) 시작해서 지금까지 쉬지 못하고 나하고 같이 일을 해 온 사람이다.
오늘따라 측은한 생각이 들고 그동안 아내가 원하던 것들을 반대하며 끝까지 우겼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토록 바꾸고 싶어 하던 거실의 소파를 그냥 더 쓰자고 반대했던 일이며, 시집올 때 사 온 큰 장롱을 바꾸고
싶어 하던 아내의 의견을 '됐다, 그만하면 아직 10년은 더 쓰겠다. 바꾸긴 왜 바꿔?' 하며 무시했던 일이 떠올랐다.
소파를 바꾸는 데는 50만 원이면 되고 장롱을 바꾸는 데는 100~ 200만 원이면 될 것을.....
둘째를 만나러 같이 서울 올라갈 때 외출복이 없어서 친구 옷을 빌려 입고 서울 갔던 일도 생각이 났다.
'50만 원이면 한 벌 살 텐데.... '
1983년 9월 우리가 7년이나 경영하던 화장품 대리점을 그만 둔 후 아내는 나를 따라 지방으로 장사를 따라나서야 했다.
당시 우리는 2.5t 탑차(냉동차처럼 생긴 차)에다 화장품을 싣고 지방 거래처에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우리는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밤이면 차 뒤쪽 짐칸에 들어가 문을 안에서 잠그고 종이 박스를 바닥에 깔고 함께 잠을 자며 그해 겨울밤들을 그렇게 보내던 날도 있었다.
차 속에서 밥을 해서 먹으며 포항, 울산, 진주, 마산을 다니며 종합화장품 가게에 장사를 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아내는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원망 없이 나를 잘 따라다녔다.
17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남의 빚도 다 갚고, 작은 아파트도 장만하고 했지만, 아내는 아직도 쉬지 못하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 같이 일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이 일하여 얻는 수입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지만. 아내는 오늘 같은 좋은 날도 미장원엘
마음대로 못 간 것이다.
예고가 있는 평창동에서 하숙하는 둘째 아들에게 매월 150만 원~ 200만 원 가량 하숙비를 보내야 하기에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애쓰는 아내다.
아내는 아이들 뒷바라지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지난번에 야마하 피아노로 바꿔 주기 위해 약 1,000만 원이나 썼고 재작년 여름에는 큰아들이 방학을 이용해서 미국 여행을 한 달간 다녀오겠다고 할 때 300만 원 이상이 들었지만 보내 주었다.
자식들에게는 잘해 주고 자신은 옷을 빌려 입으며 오늘 같은 날도 몇만 원 아끼겠다고 그냥 무대에 선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리허설 무대 위에서 한동안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자식이 뭐기에….
간혹 TV를 통해서 곤충이나 동물들이 천적이나 자연으로부터 자기 새끼들을 자신의 생명을 다해 보호하는 모습을 본다.
그렇듯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으랴만,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25년을 쉬지 못한 사람이다.
그날의 부부 합창단 연주회에서 아내는 반짝이를 뿌려 멋을 내지 않았어도, 봉긋하게 머리를 올리지 않았어도 어느 단원들보다 내 눈에 사랑스러웠고 귀하게 여겨졌다.
부부가 손잡고 함께 선 스테이지에서 '나 오직 그대를 사랑해 그 사랑 변하지 마오.' 를 부르면서 양복 안주머니에 숨겨둔 장미꽃을 꺼내어 무릎을 꿇고 남편이 아내에게 바치는 연출 시간에 나는 가슴에서 우러나온 고마움을 장미꽃에 얹어 아내에게 주었다.
사랑하는 아내여, 우리 조금만 더 참자. 믿음이가 전문의가 될 때까지만 고생을 참아보자.
'나 오직 그대를 사랑해. 아직은 아쉬움도 있지만, 그대는 나의 인생 우리는 선택했어요.‘
그날 연주곡에 들어 있었던 이 노래는 그날의 내 마음을 표현하는 노래였고,
그날 밤의 연주는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연주회였다.
2001, 06, 16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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