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 [1]

2008. 12. 24. 00:15김문일장로 회고록

 

(이 글은 제가 존경하는 저의 장인되시는 김문일 장로님 회고록입니다.
김문일 장로님은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교육생들에게 명강의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쳤던 분으로서

고 김용기 장로님의 조카가 되십니다.

믿음의 선배로 우리가 배워야할 점이 많은 분이고 한 세대 앞서 사신분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이 곳에 올리는 바입니다.

공직에 계시면서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청렴하게 평생을 사신 분이셨기에 오늘 세상의 작은 등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 글은 

동생(필명 제갈민) 이 정리해 책으로 발간한 내용입니다.                                                                    -------------------------------------------------------------------------------------------------- 

<본향을 향하여>는 80 이 넘은 노인이 평생을 쓴 일기를 토대로 하여 쓴 글입니다.
원고지 4200매 를 1200매로 줄여 이번에 회고록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의 조카로 제2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움에 있어 특별한 공로가 있었고 대통령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분의 회고록을 원고지 4,200 매를 1,200매로 줄여주는 일을 맡아 정리를 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다 쓴 지금의 느낌은 한마디로 이것이 인생이구나! 입니다.

식민지하에서 태어난 남자의 애국심과 애향심,

그리고 인간적 갈등과 좌절, 사랑과 신앙, 그리고 남은것.........

제 평생 수천권의 명작을 읽었지만 이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긴 처음입니다.

목차와 그분을 잘 아시는 분의 격려사를 올리면 내용 이해가 되실 듯합니다.

                                                                                                        제갈 민

   

 격려사

/ 이락원 목사
  
   저는 김문일 장로님을 존경합니다
   우선 그분의 인품을 존경합니다.
   연세가 높으신 어른이심에도 누구에게나 깍듯한 예의를 갖추시고 말씀 한마디도 허투루 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늘 겸손하시고 인자하신 인격을 지니신 분입니다.
   또한 그분의 신앙을 존경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깝지 않은 거리를 걸어서 새벽기도회에 꼭꼭 참석하시고 하루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버스를 타기도 불편한 교통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예배시간마다 한결같은 모습을 뵙습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을 존경합니다.
   특히 부인 고 서영옥 권사님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셨습니다.
   본 회고록에도 쓰셨습니다만 권사님이 입, 퇴원을 반복하며 인공투석치료를 받으실 때, 고통으로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며 괴로워하실 때 권사님의 손을 잡고
   "내가대신 아파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참으로 미안하오" 하고 위로하시던 분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그 분의 살아오신 인생역정을 존경합니다.
   우리 민족의 근대 격동기였던 일제치하에서와 6.25동란, 그리고 군사정권에서의 삶은 문자 그대로

   한국 근대사의 생생한 증인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민족의 고난이 곧 개인의 고난이기도 했던 이 역사를 살아오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러한 삶의 역정을 글로 쓰셨습니다. 후손들에게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이 큰 일을 하신 장로님께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의 더욱 크신 은총이 장로님의 여생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문

   나는 1922년 10월22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수많은 이 땅의 애국지사들이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일제와 싸우다 투옥되는가 하면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던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혼란스러웠던 출생시기와 짝 맺음 하듯 내 삶은 너무도 기복이 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그 고난의 길을 어찌 극복하며 뛰어 넘어 왔을까요.
   아버님의 소천과 사랑하는 아내의 투병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회고록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고록을 쓰다보니 너무도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학식도, 덕망도, 수양도 부족하고 자손들과 사회에 이렇다 할만한 공적도 하나 남기지 못한 사람이란 생각을 하니 이 글을 쓰므로 사회에 대하여 누를 끼치고 비웃음을 받는 건 아닌가 하는 무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성경말씀에 우리의 년 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시편9:10) 하였는데 내 나이 팔십이 넘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머잖아 가야 할 본향의 집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들이 있지 아니하는 영원한 내 집입니다. 준비된 마음자세로 본향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내가 먼저가요' 한마디 남기고 떠나는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며 마침내 회고록을 마감합니다. 바라기는 이 한 권의 회고록이 자자손들은 물론 신앙 생활하는 모든 분들께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등장 인물 중에 실명을 쓰지 않고 가명을 쓴 것도 있으니 독자분들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자서전을 출간함에 있어 바쁘신 가운데서도 격려말씀을 주신 서대전중앙교회 이락원 목사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감수를 맡아 보아주신 제갈 민 선생에게 감사를 드리고 또한 남성헌 목사님, 김동매 전도사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빈 김 문 일 씀 
   
   
   
  

차례.

   
   .어린 시절
   .식민지 민족의 설움
   .첫 부임지
   .도피생활
   .해방이 되었으나
   .무서운 테러
   .몽양 선생은 가고
   .숙부님의 옥고
   .계몽운동
   .6.25의 비극
   .눈물의 기도
   .행정공무원으로서의 삶
   .내무장관과 계장이 되어 만난 옛 동지
   .5.16군사 혁명
   .처음 마련한 내 집
   .이어지는 시련
   .개척교회를 세우고.
   .흑 백색 물이 흐르는 노동산골로
   .두 부류의 사람들
   .기도의 힘
   .억지로 맡은 목회
   .제 2 가나안 농군학교 개척지로
   .어려운 전도, 그러나
   .신용협동조합운동
   .신기한 꿈
   .다시 만난 사람
   .대통령 훈장
   .총무직에서 물러나
   .수위실 근무
   .개척지를 떠나고
   .어머니의 소원
   .대통령훈장보다 귀한 상
   .신앙으로 본 나의 통일관
   .본향을 향하여
  

 

 

본향을 향하여[1]


나는 1922년 10월 22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많은 이 땅의 애국지사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일제와 싸우다 투옥되는가 하면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던 암울한 시기였다.
혼란스러웠던 출생시기와 짝 맺음 하듯 내 삶은 너무도 기복이 심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그 고난의 길을 어찌 극복하며 뛰어 넘어왔을까?

아버님의 소천과 사랑하는 아내의 투병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회고록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회고록을
쓰면서 다소 부끄러운 마음도 있지만 사랑하는 자손들의 신앙생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크기에 결심하였던 것이다.

나는 1922년 음력 10월 22일 경기도 양주군 (지금의 남양주시) 봉안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봉안은 안동 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20대 후손인 현립(賢立) 형제들이 1620년경에 이주하며 뿌리를 내린 곳으로 벼슬에 염증을 느낀 29대 주현 옹이 자손들에게 절대로 벼슬을 하지말고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라는 엄한 유지를 내리자 그 자손들이 유지를 받들어 농사에만 전념하며 살아왔던 고장이다.

나는 세 살부터 잦은 병치레로 어른들을 괴롭혔다. 오죽하면 할아버지께서 "저 애를 퇴적 장에 갔다 버려라" 하셨을까.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할머니께선 내 병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작정을 하시고 나를 안고 집 앞에 있는 예배당에 나가 식음을 전폐하시다시피 하고 주야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한다. -------나를 이야기하자면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할머니시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고, 내 신앙의 기틀을 잡아주신 분이다.
원래 할머니는 광적이라고 할 정도로 유별나게 미신을 숭상하신 분이다.

사람도 끼니를 잇기 어려운 때에 집안 뒤뜰에 있는 구렁이를 집안 수호신으로 모시고 하루 세끼 꼭꼭 밥을 주셨던 분이다. 그런 분이 내가 태어날 무렵 미국 선교사 곽괄연 목사님으로부터 복음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으셨는데 어찌나 열심이셨던지 안동 김씨 문중에서 조상을 섬기지 않고 서양 천주학을 믿는다하여 할머니를 추방하겠다고 협박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께서 "문중에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하시며 옷 보따리를 챙겨 총총히 동구 밖을 나서시니 문중어른들이 손을 들고 만 것이다.

내가 6~7 세 되는 때에 4km가 넘는 용진 큰아버지 댁에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 갔다오자 마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이구동성으로 "할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저렇게 사람되었지" 했다. 나 역시도 내가 올바로 성장하여 사람구실을 하게 됨이 순전히 할머니의 기도와 사랑덕분 이었음을 의심치 않아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나는 여덟 살에 집에서 3km로 떨어진 사립'광동'학교에 입학하여 책보자기를 허리 뒤에 차고 마을 뒤 성황당 고개를 넘어 학교에 다녔다.
몇 해 후엔 인접군인 광주군 남종면에 있는 분원공립보통하교에 사학 년으로 전학하였고
열두살 때엔 서울로 전학하여 마을최초의 서울 유학생이 되었다.

그 때 내가 다닌 학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계성보통학교였다.
아버지께선 농사를 어머니에게 맡기시고 서울로 올라오셔서 내 뒤를 돌보아주셨는데 나는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동생 만일이를 데리고 청계천변 주교동에서 서울 을지로(그 당시 황금정)를 지나 진 고개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등교하였다.

6학년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께서 시골로 내려가시자 현저동에 사시는 할머니의 동생인 작은 할머니 댁으로 하숙을 옮겼다가 이내 동대문 밖 회기동에서 양약방을 경영하시는 아버지 친구 분 댁으로 하숙을 옮기었다.

같은 반 친구 교진군과 사촌동생 만일과 함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엔 경성상업실천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하숙집에서 두시간이 소요되는 먼 거리의 학교였다.
경성상업실천학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학교로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이 일본인이었고 한국선생님은 중국어를 가르치는 북경대 출신 김경탁 선생님 한 분 뿐이였다.

나는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들어드리겠다는 일념으로 가방 속에 맨소래담, 뇌신, 가요루소화제 ,옥토정기, 같은 의약품과 학용품을 넣어 다니며 학우들에게 팔아 학용품비로 조달했다. 그 때 많은 학우들이 나를 도와주었다.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3학년 신학기부터는 하숙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인 봉안에서 서울로 기차 통학을 했다.

새벽 네시반에 기상하여 세수를하고 책가방 챙기고 식사하고 자전거로 5
km나 되는 비포장 도로를 팔당역까지 달려 나와서 여섯시 기차를 탔다. 집에서 역까지의 도로는 명색이 국도이지 굵은 자갈이 깔려 있어 자전거가 달릴 수 없는 굴곡이 심한 도로였다.

양평에서 청량리역까지의 구간에서 통학하는 학생은 비교적 많은 편이였다. 덕소에서 승차하는 경성고등상업학교의 최인규, 양평의 보성전문학교 이삼혁을 위시하여 경기중학교 경북중하교 대동상업학교 경성농업학교 경성상업실천학교 소화공과학교, 배화여학교 동덕여학교 정신여학교등에 다니는 학생들이 섞여있었다.

남학생이 이십여명 여학생이 십사명 도합 삼십육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생들 중엔 일본인들도 상당수 섞여있었다. 기차안에선 웃지 못할 촌극이 종종 발생하였다.

어느날 아침, 양평에서 통학하는 보성전문학교의 (이모군과) 동덕여학교의 (최모양이) 열차 승강대 옆에서 남의 눈을 피해 서로 포옹하며 속삭이던 중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던 시골 할아버지의 눈에 띄고 말았다. 할아버지 눈에 그 광경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놈들 거기서 무엇 하는 짓들이냐? 여러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에서!"
청천변력 같은 할아버지의 고함소리가 객실 안에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가끔은 일본인 친구들이 한국여학생을 놀리며 희롱하는 일도 있었는데 한번은 내가 나서서
"너희 놈들은 남녀구별도 못하고 공중도덕도 모르는 놈이냐?"
하고 꾸짖자 마침 양평 구둔에서 채광을 하는 일본인 관리소장이 옆에 앉아 있다가 정색을 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어이 학생! 너의 놈들이라 하니 누구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가?"
네놈 말속에는 불순한 뜻이 있는 듯 한데? 하는 눈빛이었다.
이런 저런 일을 두루겪다보니 나는 통학 분위기를 보다 명랑하게 만들 그 무엇을 찾게 되었고 나아가 우리 한국학생들의 단결과 일인학생들의 한국학생들에 대한 우월감을 깎아 내릴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다. 생각 끝에 만든 것이 친목회였다. 친목회엔 다음과 같은 회칙을 만들었다.

첫째, 회원은 경경선 남녀통학생 전원을 회원으로 한다.
둘째, 기차를 승차할 때에는 남녀 지정된 객차에 승차하여야 한다.
셋째, 회원 중에 어려운 환경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이며 상호협조 하여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한다.
넷째, 각 역 단위로 한 명씩 규율부장을 두어 풍기단속에 유의한다.
다섯째, 춘추로 일년에 두 번씩 친선의 날을 정하여 회원간의 친교를 가진다.
회장은 내가 맡았고 부회장은 미쓰하라(일인), 총무 이은규, 규율부장에는 이도성, 친교부장 다나까(일인),

고문은 최인규가 맡았는데 최인규는 후에 내무장관이 되었다.

친목회 결성이후 통학생들은 한결 재미있고 명랑한 분위기에서 통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친목회 때문에 상처도 받아야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한국학생 임원 몇이 청량리 역전에 있는 원산여관방에서 성탄 축하 겸 단합 모임을 가졌다가 순찰중인 일본인 순사에게 모두 끌려갔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청량리 파출소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인 경찰의 주먹과 구두에 사정없이 맞고 짓밟혔다.
무슨 나쁜 일을 음모했다는 것이었다. 순전히 친교를 위한 모임이라고 우겼으나 그들은 믿으려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풀려나긴 했으나 이 때의 사건은 우리들에겐 잊지못할 악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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