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2]

2008. 12. 24. 00:17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2]

- 첫 부임지

1940년 3월 8일 나는 경성상업실천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처음 얻은 직장이 동두천조합이었다. 내가 맡은 일은 식산계의 산업육성지도였다.

오전엔 내무업무를 보고 오후엔 대부 신청자들의 재산현황과 토지명기장, 등기부 열람 등을 위해 면과 등기소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 때 나는 작은 방 하나를 얻어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외로운 처지일수록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자고 여겨 동두천 감리교회에 적을 두고 내 집처럼 들락거렸다.

외롭고 허전할 때가 많았지만 신앙생활도 그렇고 직장생활도 그렇고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조합에 근무한지 꼭 오십 일 되는 날 고향에서 아버지가 올라오셨다.

아버지는 나를 매우 대견하게 여기시는 눈치였다. 어렸을 때 온갖 병치레로 사람구실도 못할 것이라는 소릴 들었던 내가 봉안 역사상 첫 공무원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는 대 놓고 칭찬은 못하시고 흐뭇한 표정으로 나와 내 방을 살피셨다. 방이 너무 작고 초라해서 마음이 아프셨을 만 한데도 그런 말씀은 않으시고,

"객지에서 몸조심하고 특히 가까이 교회가 있다하니 빠지지 말고 열심히 나가서 신앙 생활 잘 하여라, 할머니께서 매우 걱정하신다."
그 말씀만 하셨다.

아버지가 오신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느라고 침구 정돈도 못하고 방안을 온통 어수선하게 해 놓은 체 출근을 하였다가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침구며 옷가지 등을 정돈해 놓으시고 람프호야까지 깨끗이 닦아 놓으셨다.

아버지를 역까지 배웅해드리고 하숙방에 돌아와 깨끗이 정돈된 방안을 두루 살펴보다가 나는 그만 눈물을 흘렸다.

그 날 나는 바다같이 넓은 사랑을 베푸시는 당신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정말 열심히 직장생활에 임했다. 내 관할구역은 다른 곳에 비해 낙후되고 넓어서 일이 퍽 고되었다. 그러나 나는 늘 상 웃는 얼굴로 주민들을 대했고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켰다. 피곤이 겹쳐 쩔쩔매는 내게 교회가 큰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 때 나는 청년 지도와 유년 주일학교 지도를 맡았는데 이때 친하게 지냈던 신앙의 동지가 마영재와 최요한이다. 나는 종종 이들과 밤이 이슥하도록 신앙문제, 농촌문제 민족의 나갈 길 등을 토론하였다.


- 도피생활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우리 한국인들을 일본 각지의 광산이나 군수공장 또는 댐 공사장 도로, 철도 부설 공사 등지의 현장으로 끌고 가더니 1939년12월1일 이른바 소위 국민징용령을 공포하여 한국청년들을 인간사냥 하듯 밤에 끌어다가 일본 중국 태평양등 격전지에 내보냈다.

점차 전쟁이 확산되자 나는 불안을 느꼈다. 나 역시 언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민과 생각 끝에 2년여간의 정든 직장과 교회를 두고 고향에 내려오고 말았다.

일본군의 위세는 중국대륙에서 태평양바다로 확산되어갔다. 이십 세에서 사십 세의 농촌청년들이 중국 남양군도 등지에서 참혹한 전쟁의 재물이 되었다. 인간사냥의 마수가 오늘밤에라도 나에게 닥쳐오지나 않을까 하는 초조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던 중 여운혁 아저씨와 같이 국외로 탈출할 생각을 하였다. 여운혁 아저씨는 몽양 여운형 선생의 육촌동생이면서 내 숙부님의 의형제다. 숙부님과 손을 잡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말함인 '이상촌운동'을 하면서 뒤로는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그분을 나는 아저씨라 부르며 곧잘 따랐다.

우리는 계동의 몽양 선생님으로부터 만주에 가서 할 일과 만나야할 사람, 그리고 그에게 전해줘야 할 사항을 지시 받은 후 고향을 떠났다. 여행사에서 표를 사는 데 여행사 직원이

"오늘까지는 경찰서장 증명 없이 승차권을 드리지만 내일부터는 경찰서장의 여행 증명서가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운이 좋으셨습니다, 마침 표가 딱 두 장 있습니다." 라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역에서 신경 행 기차를 타기 위해 개표를 하고 승강장 홈으로 들어가니 200여명의 승객들과 환송객들이 발 디딜 데 없이 붐비고 있었다. 흡사 피난열차를 기다리는 자리 같았다. 열차가 홈으로 들어오자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일제히 열차의 출입구로 달려들었다.

'김문일장로 회고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향을 향하여[6]  (0) 2008.12.24
본향을 향하여[5]  (0) 2008.12.24
본향을 향하여[4]  (0) 2008.12.24
본향을 향하여 [3]  (0) 2008.12.24
본향을 향하여 [1]  (0) 2008.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