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4]

2008. 12. 24. 00:19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4]

공한지에는 어디고 땅 한 평 남기지 않고 피마자를 심어서 기름을 짜 생산하여 출하해야했고 큰 소나무 뿌리를 태워 뿌리에서 기름을 짜내는 송탄유도 만들어내야 했다. 송탄유는
오래된 노송에서만 생산되므로 노송이 별로 없는 우리 마을은 책임량을 다 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
피마자유나 송탄유로 비행기나 기타 군수 기계류의 기름으로 쓴다니 참으로 한심한 정책이었다. 노송이 없다는 구실로 송탄유 생산을 거부 하다보니 관청으로부터 탄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마을 전체가 요주의 마을로 감시를 받았다.

어느 날 긴 일본군도를 찬 일인순사가 조안 지서 주임과 와부면 사무소직원 너댓 명과 함께 우리 집 대문 안으로 불쑥 들어와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이 마을에는 어찌된 일인지 공출 한 가마 하지 않았으니 웬일이요, 어서 공출을 하시오"
아버지께서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보시다시피 이곳 토박한 농토에서 겨우 호구지책으로 십 여 가마 농사를 짓는데 공출할 벼가 어디 있습니까?"
"성스럽고 위대한 대동아 전쟁 성업을 수행하는데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무슨 전쟁을 한단 말이오. 먹을 것 없이도 해야지. 다른 마을에서는 넉넉해서 수십 가마씩 공출하는 줄 아시오? 다 같은 형편이요. 성업을 위해서 공출하는 것이요!"
그들은 더 긴말을 않고 헛간, 부엌, 목욕탕, 쌀광, 사랑방, 내실, 집 주위 등을 샅샅이 뒤졌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좁쌀, 보리쌀, 콩 등의 잡곡 몇 가마가 다였다.

그들은 혀를 차며 작은 댁 쪽으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도 벼 한 가마 색출해내지 못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이유가 있었다. 마을사람들 모두가 쌀 광속 안에다가 이중으로 쌀광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중쌀광은 벽을 두드려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일제는 쌀 외에도 모든 물자를 강제로 수탈하여갔다. 유기, 유식기, 촛대, 향로, 대야, 요강, 교회 종 심지어 수저까지 뺏어감에 따라 사람들은 교회 종은 물론 유기제품을 땅속 깊이 파고 묻어두었다. 오월초순 어느 날이었다. 숙부님께서 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오셨다.

"오늘밤부터 너와 같이 있을 청년이다. 이 청년은 몽양 선생님의 장조카가 되며 이름은
여성구이고 여운홍 선생님의 장남이 되고 현재 일본구주대학에 재학중인데 이번에 학병
소집장이 나와서 피신하여 왔다. 당분간 함께 잘 지내거라"
여성구는 일본에서 피신하여 부산으로 온 후 다시 열차 편으로 온종일 와서 그런지 얼굴이 몹시 여의고 초조해 보였다.
우리는 여성구를 작은 사랑방에 숨겨두고 큰사랑만을 사용하였다. 나는 낮에는 그와 함께 영어 공부를 하고 밤이면 같이 뒷동산에 올라가서 체력단련을 했다.

매일 매일이 살얼음 위를 걷는 듯했다. 그때는 대전형무소에서 출감한 여운형 선생이 작은 숙부님 댁에 머물고 있을 때라 조선총독부 경찰국의 고등 밀정원 오병철이 한 달에 두 번 씩 찾아와서 마을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가곤 하던 때였다. 오병철은 많은 애국투사들을
잡아 가둔 변절자 매국노였다. 원래는 소만국경에서 독립투사로서 혁혁한 공을 세운 투사로써 일본 관헌들이 두려워하던 자였으나 불행하게도 체포되자 일제의 앞잡이가 된 사람이다.


지서주임도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내 책꽂이를 살펴보고 책을 빌려 갔다. 책은 어김없이
반환되어 왔으나 읽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감시차원에서 빌려간 것이다. 여성구는
얼마후 자신의 고향인 양평 묘곡 마을로 은신처를 옮겼다. 일본에서 도피한 사람이 고향에 와서 숨어있을 거란 의심은 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가 떠난 지 얼마 안되어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재학중인 이호재군이 갑자기 찾아왔다. 봉안에서 서울로 기차 통학할 때부터 친구로, 동지로 유대를 가지고 조국의 앞날을 함께 염려하였던 절친한 친구였다.

학병소집영장을 받고 입대하던 중 야밤에 탈출을 하였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었다.
"이렇게 찾아와서 고맙네. 큰 고생 많이 하였네"
그는 고구마 저장고에서 십여 일이나 은신했다가 야음을 타서 본가로 갔다.

태평양전쟁이 점차 고조되고 삼국동맹을 맺은 이태리, 독일이 쇠퇴하여 연합군에게 항복하는가하면 미공군 B-29가 동경은 물론 서울 근교까지 와서 배회했다. 해방의 기미를 느꼈던가, 기고만장하던 오병철이 숙부님과 몽양 선생에게 접근하여왔다. 그 부인도 아이들을 데리고 봉안을 자주 찾아왔다.
1945년 유월하순이었다. 경기고등보통학교 오 학년 재학생인 과학도 손 웅이 몽양 선생을 찾아왔다.

"일본도 곧 독일과 이태리같이 항복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조립한 단파 라디오를 통하여 청취한 국제정세전황을 몽양 선생에게 보고하였다. 손 군은 팔월십이일 아침 다시 자신이 청취한 외신을 몽양 선생에게 보고하였다. 그 날 몽양 선생이 서울로 상경하였다. 숙부님도 양평 용문 산에 은둔시켜둔 동지들을 격려 규합하기 위하여 용문 산으로 가셨다.

팔월십오일 정오를 기하여 일본천황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역사적 순간이었다. 서울로부터 모두 상경하라는 긴급연락을 받고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해방의 기쁨에 들뜬 군중들이 역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의 함성은 열광적이었다.

참말로 해방이 되었구나!
일본이 급기야 항복하였구나!
가슴 벅찬 감동이 전신을 휘어 감았다. 군중을 헤치고 전차를 타려하니 만원이었다.
사력을 다하여 겨우 승차하여 동대문까지 갔지만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전차가 멈추고 말았다. 전차 길을 가득히 메운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쳐대고
있었다.
언제 그렇게 태극기를 만들어 놓았던지 거리가 온통 태극기의 물결로 차고 넘쳤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격의 날이었다. 땅은 태극기와 인파로 메워지고 하늘은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소리로 메워지고 있었다.


숙부님과 함께 인파를 헤치고 몽양 선생댁으로 갔더니 경비라고 쓰인 완장을 팔뚝에 두른 청년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게 보였다. 몽양 선생 댁으로 들어서니 사모님이 뜰 아래까지 뛰어 내려와 반가이 맞아주셨다.
"그 동안 참으로 고생들 많이 하셨죠. 어서들 오세요"
사모님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디 계신가요?"
"총독부에 들려서 서대문형무소로 해서 저녁 일곱시에는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오신다하시고 아침 일찍 출타하셨죠. 지금은 어디 계신지 잘 모르겠어요"

"이곳으로 들어오는 골목길은 경비를 하고 있는 게 보였으나 집안에는 아무도 경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아직은 책임지고 경비하는 사람이 없으나 박승환 중위가 수시로 들어오곤 합니다"
숙부님께서는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으셨는지 내게 말씀하셨다.
"우선 너만이라도 잠시 여기 있어라 갔다 올 때까지..."

"네 알겠습니다"
숙부님과 아저씨는 나를 남겨두고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셨다.
그 날 밤 열 시경이었다. 박승환 중위와 문용채 중위가 청년 십여 명을 데리고 와 골목길과 집 주위 요소에 세워두었다. 나는 계동 입구에 있는 임용상의 집으로 갔다. 그 집은 임시
경비본부였다.
이삼십 명의 씩씩하고 체격 좋은 청년들이 그날 밤 그 집으로 몰려왔다. 다음 날 아침에도 많은 청년들이 왔다 그들은 밤새워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만세를 부르고 온 청년들이었다. 나는 표 군과 같이 대원들의 출입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다. 삼일 째인 십칠일 밤 아홉시 경이었다. 괴한들 삼십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왔다.

"이놈들아 모두 속히 나와라! 다 때려부수고 죽이기 전에 나와라. 이놈들아 개 xx들아"
괴한들은 대문을 넘어와 현관문을 두드려댔다.
"현관문을 열지 못해? 부수기 전에 어서 빨리 열어. 이놈들아."
일층과 이층 각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리 대원들은 유리창을 열고 내다보며 맞고함을
지르며 이구동성으로
" 어디 와서 고함을 지르는가. 너희들의 정체는 무엇이냐? 폭도들아!"
"테러단들아 어서 테러한 놈들 나와라."
"무슨 소리냐 테러한 놈을 내놓으라니?"
"옥이동에서 테러한 놈들이 분명히 이 곳 계동골목으로 도망쳐 왔단 말이야. 어서 그 놈들을 내놓으란 말이다"
괴한들은 소리소리 치르며 대문 밖과 담을 둘러싸고 일부는 현관문 앞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방안에 많은 청년들이 있으니 감히 들어오지는 못하고 밖에서만 고함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나는 대원 한사람을 시켜 이층 창을 넘어 옆집 지붕을 타고 넘어가서 계동 몽양 선생님 댁에 계시는 숙부님께 기습당한 사실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한참 후 우리 대원들과 괴한들이 대문과 담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여

고함과 욕설을 퍼부어 대고 있을 때 일인경찰관원들이 왔다. 천황이 항복을 하였어도 일인경찰들이 여전히 치안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괴한들과 우리 대원들이 전부 연행되어 계동골목을 벗어날 즈음 숙부님께서 박승환, 문용채 두 중위를 대동하고 나타나셨다. 숙부님의 항의로 우리는 일인경찰들에게서 풀려 날수 있었다. 그 날의 사건 내용은 이랬다.

오후 세 시경 그들이 모시던 양주삼, 신흥우 두 분 선생이 외출을 하려다 괴한 이삼 명에게 테러를 당하였다. 도망자들을 잡기 위해 근동을 탐색한 결과 임용상의 집에 청년들이 많이 몰려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우리가 그 테러단 인 줄 알았던 것이다. 해방 후 첫 번째의 테러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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