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 [3]

2008. 12. 24. 00:18김문일장로 회고록

본향을 향하여 [3]

운혁 아저씨와 나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승차하려고 애를 썼으나 밀고 당기는 사람들 힘에 밀려 함께 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내 옆에선 일본군 중위 한 사람이 옆구리에
긴 일본도를 차고 한 손엔 큰 보따리를 든 체 승차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군인이라고 해서 나보다 나을게 없는지 그도 기차에 오르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나보다 행동이 빠른 운혁 아저씨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사람들을 밀치고 열차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내가 먼저 열차 안으로 들어가서 좌석을 잡을 터이니 김 군은 저 일본군인의 보따리를 달래서 들고 천천히 올라오게!”
"네, 그러지요. 아저씨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세요”
내가 중위의 보따리를 달래서 들고 그와 함께 객차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저씨는 벌써 세 사람의 좌석을 확보하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초만원인 곳에서 자리를 잡고 보니 하나님께서 이 열차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한 마음에 마음속으로 감사 기도를 드렸다. 우리 덕분에 앉아 가게 된 일본중위는

"젊은 청년들 참으로 감사하오 이렇게 좌석까지 잡아 주어서”
하고 고마워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일본 중위를 잘 이용하면 신경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운혁 아저씨께 귓속말을 했다.
"아저씨 잘 되었습니다. 이 중위하고 이야기하면서 가지요. 어디까지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는 곳까지 정답게 대화하며 가는 게 어떨까요, 도움이 될 듯한데요."

“나도 그럴 요량으로 같이 오라고 했다. 김군, 주요 역마다 기차가 정차 할거야.
그 때 마다 빨리 내려가서 보리음료수를 떠다가 중위에게 주도록 하세,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말야. 그러면 압록강 국경을 넘을 때 다소 도움이 되겠지”
중위에게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보니 봉천까지 간다고 했다. 봉천이라면 신경 조금 못
미치는 곳이다.
반가웠다. 일본군인과 함께 있는 게 이렇게 반가울 때가 있다니.
"청년들의 목적지는 어데죠?”

그가 물었다.
“신경까지 갑니다”
"그래요? 참으로 좋은 동행이 되겠소. 신경은 왜 가죠?”
“네 신경에 친족이 계시는데 위독하다고 전보가 와서 가는 길입니다.”,
“그래요? 염려 되겠네요, 봉천까지 동행합시다.”

중위는 친절하였다. 중위 옆자리에는 사십 세 가량의 일본여인이 앉았다.
우리는 그 여인에게도 친절하게 대하였고 여인도 우리와 말을 나누는 걸 꺼려하지 않았다.

네 사람이 한 가족 같은 분위기로 다정하게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철마는 북으로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기차가 개성을 지나 토성 역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즉시
뛰어 내려 홈에서 파는 보리 온수차를 사왔다.
중위와 일본 여인에게 먼저 한 컵씩
나눠주니 참으로 고마워하였다.

토성 역부터는 차 내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며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동경찰이 사복차림으로 승차하여 승객들의 신원을 한 사람씩 검색하였다. 마음이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형사들이 다가올수록 나와 운혁 아저씨는 일본인 중위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우리의 친절에 푹 빠져있던 중위는 아무 의심 없이 우리의 대화요청에 응해주었다.
마침내 우리 앞에 와 멈춘 형사들이 일본인 중위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일행이 됩니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어데까지 가죠?”
“신경까지 갑니다”
형사들이 뭐라고 더 물으려고 하자 일본인 중위가 끼어 들었다.
“이 두 청년은 나와 같이 가는 청년들이요.”
형사들은 그 말에 싹싹하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까.”
무사통과였다. 형사들은 바로 물러갔다.

기차가 사리원 역에 도착하자 형사 팀이 교체되었다. 인상이 썩 험악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바짝 긴장이 되었다.
나는 아까보다 더욱 친밀하게 중위와 대화를 나누었다. 살기 위해서 누구와 그렇게 가까운 척 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형사들이 다가왔다.
“보아하니 한국 청년인데 어데까지 가는가?”
“신경까지 갑니다”
내가 대답했다.
“왜 가는가?”
“친족 한 분이 신경에 거주하시는데 위독하시다해서 모시러 갑니다”
대답을 하는 내 머리끝이 쭈삣섰다. 가슴이 떨렸다. 더 꼬치꼬치 물었으면 내 목소리가 떨려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 물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을 안고 일본인 중위를 쳐다보니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그가 나서주었다.
“이 청년들은 나와 같이 가는 청년이니 그리 아시오”
형사들은 그의 말 한마디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곤 더 묻지 않고 뒷좌석으로 가는 것이었다. 기차가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전시가 되어서 그런지 역 부근의 거리는 어둠만 가득했다. 기차는 평양역에서 약 십 여분동안 머물다 기적을 울리며 또 다시 달리기 시작하였다 평양에서 신의주까지의 검문 검색은 더욱 삼엄하였다.
이번만 무사하면....간절한 심정으로 무사히 통과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험악하기 그지없는 얼굴의 형사들이 두 사람의 승객을 객차 뒤쪽으로 끌고 나갔다가 한참만에 승객들은 어디 두고 자기네들만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나자 가슴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기도만 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우리들 앞에 다가온 이 형사들이 일본군 중위에게 싹싹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장교님 수고하십니다. 실례지만 어데까지 가십니까”
“네, 봉천 까지 가오”
“이 청년들은 같이 가는 동행인가요”
“네 그렇소.”
그걸로 검문 끝! 이었다.
하긴 멀리서 검문하면서 우리가 일본인 중위와 아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으니.
비록 열차 안이지만 제단을 쌓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밤9시경에 국경선인 신의주 역에 도착하였다. 신의주 역에선 세관원들이 승차하여 승객들의 소지품을 일제히 조사하였다.

얼마 후 기차는 압록강의 철교를 통과하였다. 학교에서 배웠던 우리나라 유일의 개폐식
철교를 넘자니 가슴 뭉클한 것이 솟아올랐다. 이 철교를 언제 또 다시 건너 올 수 있을까 생각하니 암담하기만 했다.

우울한 심정으로 만주국 첫 관문인 안동 역 이국 땅에 도착했다.
이곳에선 승차하는 승객들의 옷차림부터 달라 이국 땅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승객이 두루마리 같은 두터운 검정 색의 중국 복장을 하였고 발음도 강약이 심하며 몸에서 파, 마늘 등의 이상야릇한 냄새를 풍겼다.

열차는 밤새도록 요동칠백리의 광활한 대지를 달려 아침 일곱 시경에 봉천역에 도착하였다. 이십사시간을 정답게 대화하며 동행해 주었던 중위가 하차해야 하는 곳이었다.
우리도 아쉬웠지만 중위는 더 아쉬운 표정이었다.
"목적지까지 잘들 가요, 건강하게. 안녕히........."
작별의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비록 일본군인이지만 우리들에게는 더 없이 고마웠던 사람이었다.

그가 내린 후엔 중국인들과 함께 앉아 갔다. 그들과는 언어가 소통되지 않아 불편하였다.
중학교 때에 배운 중국어로 인사말 정도는 하였으나 그 외의 말은 잘 몰라 한자로
필답하면서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열차는 신경에 도착하였다.

신경엔 오족협화회에 근무하시는 최근우 선생이란 분이 계셨다.

최근우 선생은 만주국 *안동성장을 역임하였고 퇴임한 후엔 이 기관에서 봉사하면서
여운형 선생의 지도를 받아 국내외의 독립투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분이었다.

오족협화회는 일본, 한국, 중국, 만주, 몽고 등 오족이 합해서 아세아를 부흥시켜 공존 공영하겠다는 취지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일본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으니 겉보기엔
어용단체라 할 수 있으나 그 속엔 외적으론 신변의 안정을 꾀하면서 내적으론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많은 애국지사들 을 품고 있었다.

최근우 선생은 우리를 진심으로 반기며 따뜻이 영접해 주었다. 우리는 여운형 선생으로부터 받은 밀령을 전달해 드리고 국내정세도 세밀히 보고하였다.
보고를 듣는 내내 감격과 분노를 번갈아 표하는 최근우 선생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내가 보기에 그는 분명 큰 애국지사였다.

우리의 목적지는 중국이었으나 최근우 선생은 당분간은 같이 있자고 했다. 중국의 시국이 긴박한데다 일본 광동군 헌병을 위시한 관헌들이 혈안이 되어 한국에서 도망 온 한국청년들의 체포에 주력하고있고 중국과 소련으로 가는 국경선이 모두 페쇄되었다는 것이다.
신경도 안심할 곳이 못 된다고 하였다. 곳곳에 수사요원들이 배치되어 한국에서 피신 온
애국지사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신경까지 오는 길도 온갖 우여곡절을 거친 고단한 행로였건만 무사히 도착했다고 안도하는 순간 또 다시 느껴야하는 신변의 위협에 조국을 잃은 피지배민족의 설움을 톡톡히 맛보아야했다.
언제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일제로부터 풀어주실 것인가..... 혼자 쓸쓸히 중얼거려보았다.

우리는 수요일 밤과 주일날 예배를 위해 교회에 가는 것만 빼곤 여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십 여 일이 지난 후 최근우 선생으로부터 길림성 돈화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른 아침 돈화행 열차를 탔다. 신경에서 도문까지 가는 열차는 완전 무장한 전투복차림의 헌병과 경찰, 사복차림의 눈빛이 매서운 사람들이 2인 1조가 되어 순찰하였다.

공포 분위기였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거동이 수상하면 바로 연행을 하였다.
얼굴이 흙빛이 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오금이 저렸다.
언제 우리에게 다가와서, 갑시다 할지 모를 일이었다. 다행이 나는 한번도 검문을 당하지 않았으나 운혁 아저씨는 몇 번이나 검문을 당하였다.
구변 좋으시고 슬기로운 아저씨는 그 때마다 빈틈없는 대답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우리는 오후 3시경 무사히 돈화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최근우 선생이 시킨 대로 돈화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돈화귀농조합을
찾아갔다. 그곳의 김동순 조합장을 만나 최근우 선생의 서찰을 전하였다. 조합장은 서찰을 다 보고 난 후 같이 일해보자고 하였다. 돈화귀농조합은 수백 만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쌀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농장 책임자가 김동순 씨였다. 그의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업무내용을 설명 듣고 근무를 하였는데 10 여일 쯤 지나서 조합 총무가 묻는 것이었다.
"요사이 한국에서 젊은 청년들이 많이 만주로 들어온다 하는데 국내에 무슨 긴박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우리 조합을 찾아와서 취업을 부탁하는 젊은 청년들이 매일 이삼 인씩 있는데요?"
"전시하라 생계가 어려우니까 이국 땅으로 오는 것이겠지요"
"두 청년들은 어떻게 오셨죠?"
"만주가 넓다 하니까 넓은 땅에 와서 희망을 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것이 사실인가요? 갑자기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오니까 시국이 좀 이상한 듯 해서요."
"그렇게 많이 오나요?"
"예. 그런데 우리조합에 근무하시려면 퇴거증명서가 있어야 하는데 퇴거증명서는 가지고 왔소?"
"갖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고향에 즉시 연락하여 십일 내에 퇴거증명서가 오도록 연락을 하시오.
곧 연락을 하시오. 퇴거증명이 없으면 근무할 수 없소"

뜻밖의 요구였다. 여기도 우리가 있을 곳이 못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앞길이 암담하고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운혁 아저씨도 걱정스런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할지 묘안이 없어 난감하네"
"넓은 땅 만주도 있을 곳이 못됩니다."
"도피 온 사람더러 퇴거증명서를 가져오라니 어이없는 일일세"
"서울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달리 길이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온 우리는 왕십리 박성복 동지 집에서 은신하였다. 불안과 초조 속에 얼마간 시간을 보낸 후였다. 우리 두 사람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양주군의 김정재 군수의 도움으로 징용을 면제받을 수 있는 농업실천요원으로 위촉받은 것이다.
집에서 안심하고 농사지도를 하며 지역 사회에 봉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런 경사가 없었다. 농업실천요원의 임무는 생각보다 훨씬 고되었다. 노동에 강제 동원되는 것은 물론이고 수시로 고된 훈련이 있었다. 의정부에서 능곡으로 연결되는 의능선의 부설공사에 동원되었을 때는 천막 속에서 수십 명의 장정과 함께 합숙을 하였고 주먹밥 한 덩어리로 하루를
버텨야했다. 매일 십육시간 이상을 곡괭이로 흙을 파고 흙차로 토석을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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