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기 목사님 소천 소식을 듣고/중앙침례교회 시무하시던 때 회고

2020. 1. 2. 06:55교회,신앙생활

김충기 목사님 소천 소식을 듣고

 

지난 1225, 존경하던 김충기 목사님께서 소천하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내가 처음 김충기 목사님을 만난 때는 19세 때(1968년)였다.

장로교회에 다니다가 중앙침례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석한 후 중앙침례교회에 등록하였고 

청년 시절 중앙침례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 하던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김목사님께서는 거의 매주 부흥집회 인도하시러 다니셨고 사모님은 다섯 아이를 키우시며 김 목사님 안계신 교회를 기도로 지키셨다.

목사님께서 부흥회 가시고 계시지 않으실 때 사모님은 방에서 주무시지 않고 거의 매일 교회에서 기도하시고 눈을 붙이며 사셨다.

교회 1층 예배실에서 새벽기도를 하던 때 , 출입구 쪽에는 항상 사모님이 앉아서 기도를 하셨고 무릎 앞에 애기를 눕혀 놓고 기도하시곤 했다.

 

김 목사님은 전국적으로 부흥 집회를 인도하시면서 당시 널리 알려진 강달희, 오관석, 지덕, 신현균, 이만신, 고승혁 목사님 등과 함께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셨다.

집회 가셨다가 금요일 날 오셔서는 사모님으로부터 그간의 교회 일을 전해 들으시고 심방을 하셨다.

사모님께 말씀드리면 목사님이 결정하셨기에 교인들은 평소 사모님을 가까이 했다

 

김 목사님은 검정색 양복을 잘 입으셨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김목사님의 양복이 반질반질했다는 것이다.

집회에 다녀오시는 목사님을 마침 교회에 있다가 만나는 날이면 환하게 웃으시던 목사님의 그 미소와 반질반질한 양복이 잊혀지지 않는다.

참 검소하게 사신 분이셨기에 성도들이 목사님을 더 존경했고 부흥강사로서 유명한 분이셨기에 또 좋아했다. 


우리 교회 주일 오후 예배는 늘 부흥회였다. 

목사님께서 집회를 인도하실 때 자주 찬송가185장(통179장)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를 부르자고 하셨다. 

한 쪽에서 누가 북을 치면 성도들도 따라 박수를 치면서 빠른 템포로 함께 목청껏 찬양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각양 은사를 받는 이들이 많았다. 제단에 불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었다.

사람이 만든 불이 아닌 오묘한 불이 강단에 일곱 번 나타난 신비한 일도 있었다

그래서 이웃 신광교회 성도들과 신암교회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는 대구시내 성도들이 많이 와서 함께 은혜를 받았다

김목사님의 칠판 설교는 유명했다.  분필로 글씨도 잘 쓰셨고 그림도 잘 그리셨다.


언젠가 목사님께서 미국에 집회 가셨을 때 내게 엽서를 보내주셨는데 내게만 보내주셨는지 다른 청년들에게도 보내주셨는지 몰라서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상하셨던 분이셨다.

 

목사님은 새벽 기도에 나온 성도들이 기도하다가 강대상 가까이 앞쪽으로 나가서 기도하면 오셔서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머리를 꾹꾹 누르시면서 방언을 섞어서 힘있게 기도해 주셨다. 

나도 안수를 받기 위해 토요일 밤에 교회로 가서 기도하다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오곤 했다.

 

당시 나의 기도제목 중 하나는 부모님이 예수를 믿는 것이었다.

내가 군에 입대할 즈음에 부모님께 내가 보고 싶으면 내가 다니던 교회에 다니시면서 내가 없어 빈 자리를 대신 채워달라고 말씀드렸더니 

부모님은 북비산 로타리에서 동대구 시장까지 그 먼길(5K쯤)을 걸어서 교회에 다니셨다.

 

목사님께서 군에 있는 내게 편지를 주셨는데 부모님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신다고 알려주셨고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김 목사님께서 누추한 우리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심방 오셨다고 고마워하시며 그 말씀을 몇 번이고 내게 하셨다.

목사님의 그 사랑 덕분에 부모님은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셨다고 훗날 내게 말씀 하셨다.


김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서울 성도중 몇 분이 김목사님을 서울로 모셔 갈 때 교회 온성도들은 매우 서운해했지만 김 목사님을 우리의 욕심대로 대구에 계시게 할 수 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보내드렸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사택을 떠날 때는 온교회가 눈물바다가 되었다. 목사님도 목사님이지만 사모님 같은 분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해서....


김목사님께서는 서울로 가신 후 우리 부부 약혼식날 한일관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주셨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대구 대덕침례교회에 김 목사님께서 집회 오셨을 때 목사님을 뵈었는데 중풍이 작게 왔다가 회복이 완전하게 되지 않으셨는데도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예의 환한 웃음으로 반겨 주셨다.

 

김 목사님은 잊지못할 아버지 같은 목사님이시다. 

소천하셨다기에 서울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현재 매장을 이전하는 중이라 많이 바빴고 기독교 한국침례회총회장으로 장례를 진행한다기에 올라가지 못했다.

보고 싶은 사모님과 김성호, 김성범, 김성국, 김성일, 김정란 유족 모두가 목사님의 훌륭한 삶을 본받고 아름답게 사시기를 기도로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2019. 12. 28

글쓴이 제갈유태

 

명절에 김목사님께 세배 가서 뒷줄 우측이 필자




뒷 열 김 목사님 왼쪽 네번째가 필자


선글라스 쓴 필자


가운데 애기를 안고 있는 사모님과 오른 편에 김목사님...

뒷 줄 왼편에서 두 번째가 김연욱 목사님, 그 옆이 필자


청년회 회원들과 ...맨 앞 줄 중앙이 필자


중앙침례교회 2층 대예배실  찬양대 지휘자 장덕환



중앙침례교회 2층 대예배실 지휘자 최창식



대구 기도원에서 집회마친 후 김목사님과 사모님, 뒷줄 왼쪽이 필자





김목사님 강남중앙침례교회에 계실 때 필자 약혼식날.  1976. 5월, 한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