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출장

2021. 3. 13. 22:52구, 홈페이지 자료

310일 새벽 5, 괘종시계 소리에 일어나서 서울 갈 채비를 한 나는 611분 발 새마을 상행열차를 탔다.

스페인에서 수입해 오는 야드로가 새로 들어왔다는 길무역의 연락을 받고 실물을 보고 주문을 해야 하기에, 또 여타 다른 볼일도 있어서 서울 출장을 나선 것이다.

 

이른 아침 기차라서 그런지 객실 내에는 대부분 사람이 의자를 뒤로 한껏 제친 체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자고 있었다.

 

내 옆자리는 스물넷 정도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나와 같이 자리를 찾아 앉게 되었다.

나는 가방을 무릎에 얹어 놓고 잠을 청했다.

 

한숨을 맛있게 자고 눈을 떠보니 기차는 대전을 지나고 있었고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신문을 꺼내 읽으며 옆자리 아가씨를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컴퓨터로 프린트한 듯한 리포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목이 '음악 심리학'이었다.

 

"음악 전공하시는 모양이지요?" 말을 붙여 보았다.

"!"

" 어떤 전공을 하시는지."

" 피아노 전공합니다." 아가씨가 웃으며 대답을 했다.

" ! 그렇습니까? 우리 애도 피아노 전공을 하고 있는데....

지금 서울에서

하숙하고 있지요. 지금 고3인데 서울예고에 다니고 있습니다."

 

묻지 않는 것까지 내가 말하는 것은 신이 나서다.

소망이 이야기만 나오면 그저 신이 나는 걸 나도 어쩔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선 사단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도 욥이 자랑스러워 앞에 서 있던 사단에게 자랑하셨는데 뭘.....

 

소망이는 나의 자랑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물론 믿음이도 자랑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아가씨는 효성여대 피아노과를 졸업했으며 지금 대학원에 진학할 채비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약해서 무슨 소린지 정확하게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내 명함을 건네주며 오디오를 구입할 때 특별히 싸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며

위치까지 일러주었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다 싶어

"그래, 아가씨는 혹시 교회 다녀 본적이 있습니까?"

하고 전도의 운을 뗀 내게

그녀는 "교회 반주를 맡고 있습니다. 저도 여쭤보고 싶었는데요. 장로님이십니까?"

하고 웃으며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경상도 아가씨이면서 말씨가 세련되어 있었다.

 

" 아닙니다. 장립 집사입니다."

" 장로님 같으셔서...."

아가씨는 알고 보니 불로교회의 반주자였다.

 

아가씨도 내게 전도를 할 작정을 했었던지 매우 상냥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더니 같은 고신 교단의 이웃교회 반주자 자매였던 것이다.

우린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서울까지 지겹지 않게 갔다.

 

서울역 앞 지하도에서 우동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전철을 탔다.

잠실역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길 무역에 도착하니 오전 1040분이었다.

 

몇 번 만나 아는 담당 직원을 만나 전월 누락된 세금계산서와 거래 명세서를 받아 가방에

넣고 나서 사장실로 가서 한 사장과 차 한잔을 하며 경제문제와 사업에 관한 대화를

잠시 나누다가 나와서 회사 지하실로 내려가 김 차장과 함께 야드로를 골라서 16점을 챙겨

놓았다.

 

서울 출장을 오면 항상 시간을 쪼개 써야 하기에 대접을 받을 여유가 없어.

점심을 함께하자는 김 사장의 제의를 사양하고 택시를 타고 테크노마트로 향했다.

 

수입가전 매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스피커 수입회사의 김준규 부장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어떻게 올라왔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이 수입하고 있는 스피커를 살펴볼 생각을 하고 염두에 두고 있던 참이었기에

"아니 김 부장이야말로 여기 왠일입니까? 내가 올라온다는 것을 몰랐을 텐데...."

저쪽에 있었는데 전무님이시길래."

 

스피커를 보여 주겠다는 그를 따라 가보니 문화 전자라는 오디오 전문

숍이었다.

그곳 사장과 명함을 건네며 인사를 하는데 전에 파이오니어 DVD를 전화로 한번 거래

했던 집이었다.

 

가끔 서울 출장을 오면 꼭 이런 곳엘 들리는 이유는 변화하는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을

는 유익이 있고 새로 출시되는 신상품의 실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은 정보가 대구보다 빠르다.

가격 동향이나 신상품에 대한 정보가 늦으면 그만큼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고

구매 단가도 손해를 보게 되는 법이라서 부지런히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이다.

이것은 사업에 있어 필수적인 일이다.

 

나는 카다로그를 몇 장 얻어 가방에 넣고 그들과 헤어져 강변역에서 전철을 타고 가다 신용산역에서 내렸다.

일부러 전자상가까지 걸으면서 길가의 상가들을 둘러보았다.

일본에 아키하바라 전자상가가 있듯이 용산전자상가는 집단 전자상가로서 언제나

봐도 대단한 곳이다.

 

소망이에게 전화를 해서 저녁을 함께하기로 해 놓고 용산전자상가 이쪽저쪽을 둘러

보았다.

밀레가전에서 처음 오디오 품목을 추가하려 할 당시 조언과 도움을 줬던 부흥전자에 가

보았다.

부흥전자라는 상호가 믿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내가 찾아갔던 집이다.

 

요즘 돈 될만한 것이 없다는 낙심 섞인 그의 말을 들으며 잠시 앉아 있다가 차 한잔

대접을 사양한 체 그 집을 나와 다른 곳으로 갔다.

 

전자상가 2층 오디오 가게를 돌아보다가 몇 년 전 일본 동경 오디오 쇼에 같이 간 적이 있는

보명전자 김 상무를 찾아갔다.

그와, 앞으로의 시장 전망을 이야기하며 오디오에 관한 여러 정보를 얻었다.

 

저녁 6시경 용산전자상가를 나온 나는 을지로 입구 지하상가로 갔다.

대구에 있을 때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던 오남미 집사가 그곳에서 골프 시상품 센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기반을 잡고 어엿한 사업가로, 미스코리아 최지은(1999년 미스코리아 )

어머니로 잘살아가는 오 집사다.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오 집사를 나는 서울 올라오면 한 번씩 통화하곤

한다.

오 집사가 어려울 때 남편 최 집사와 우리 집에 잠시 다녀간 적이 있는데 (믿음이가

4살 정도였을 때) 그때 기념으로 찍어 둔 사진 속에 있는 코흘리개 여자아이가 최지은

양이다.

 

찾아갔더니 토요일이라 일찍 문을 닫고 오 집사는 없었다.

낮에 통화하면서 7시에 만나자고 하였는데 장소를 정확히 하지 않은 나의 실수였다.

평상시 같으면 7시에 문을 닫는데....

 

휴대폰에 메시지를 남겨 놓고 롯데백화점으로 올라갔다.

서울 출장길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롯데백화점 둘러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수입가전매장을 둘러보았다.

가격을 외워 외진 곳에 와서는 전자수첩에 메모했다. 시장조사를 하는 것이다.

 

약속한 시각에 나는 백화점 정문으로 나가 소망이를 만나 백화점 11층에 있는

식당가로 올라가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불고기 3인분을 시켜 놓고 먹으며 16일에 있을 예고연주 오디션에 관한

소망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냉면까지 먹고 나온 우리는 옆 건물 롯데 호텔로 갔다.

호텔 로비에서 오 집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믿음이가 아주 어렸을 때 서울로 올라가 오 집사는 소망이를 처음 본 순간 "믿음이가?.."

하며 반갑다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믿음이가 아니고 소망이지.... 믿음이 동생.... 서울서 피아노를 하는....."

손을 내밀어 보라는 소리에 소망이는 양손을 오 집사에게 펴 보였다.

 

"손이 커서 피아노를 잘 치겠네 키도 크고..."

소망이를 처음 보는 오 집사는 소망이에게 "그래 다음에는 아빠하고 같이 식사라도 함께

하자" 하며 밝게 웃었다.

 

소망이가 돌아가고 나는 오 집사와 함께 그 직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강남으로 집

구경을 갔다.

집에는 남편인 최창식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대 작곡과 교수였던 최 교수의 아들인 최 집사는 25년 친구다.

 

2층 복층인 그들의 집은 넓었고 값이 나갈 것 같았다.

콘티넨털 호텔 건너편 부촌에 있는 고급빌라였다.

오랜만에 본 그 들과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다가 920분경 집을 나섰다.

최 집사가 크라이슬러 자가용으로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태워 주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은 몇십 년 만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셈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겁쟁이가 된 나는 고속버스를 타지 않는다.

서울이든 어디든 기차가 안전하고 빠르고 해서 늘 기차로 출장을 다니는 편이다.

 

매표원이 건네준 표는 밤 1120분 대구행 2번 좌석표였다.

중간 좌석으로 바꿔 달라고 했더니 1140분 표가 있다고 했다.

잠시 주저하다가 나는 1140분 좌석표로 바꿔 받았다.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2번 좌석보다 6번이면 더 안전할 같은 생각을 하는 겁쟁이다.

믿음이 없어진 것일까?

 

서울 출장을 비행기를 타고 가라고 해도 죽을까 겁이 나서 꼭 기차를 타고 다니는 이유는

아이들을 위해서이다.

믿음이, 소망이가 자라면서 나는 고속도로를 승용차로 달리더라도 120 Km/h 이상은 절대 넘기지 않는다.

 

내가 지금 죽으면 믿음이, 소망이 뒷바라지는 누가 할 것이냐 하는 생각을 하면 불안한

마음이 항상 나를 조심하게 만든다.

아내 김 집사가 살아가야 할 염려는 하지 않으면서도 소망이의 날개를 꺾게 되는 것을

걱정하게 되니 아내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안전벨트를 매고 의자를 뒤로하여 잠을 자면서 대구로 내려오는 길

피곤해서 휴계소에 버스가 멎었을 때도 내리지 않고 계속 잠만 자고 왔다.

대구에 내리니 주일 새벽 320분이다.

 

고속버스 기사는 엄청나게 과속을 한 셈이다.

잠을 잤으니 망정이지 깨어 있었더라면 운전사의 과속 때문에 벌벌 떨고 왔을 뻔했다.

 

2001년 03월 11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