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어져 가는 젊은이들에게

2021. 3. 13. 23:20구, 홈페이지 자료

지난봄,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밟으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곤색 양복을 입은 어떤 동양 신사가 역시 줄을 서서 일행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50세 쯤 되어 보이는 그 사람의 양복 깃과 어깨 위에는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비듬이 덮여 있었다.
U자형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의 양복에 떨어진 그 비듬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 신사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일행들과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한 기분이 들게 할 만큼 비듬이 심각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이 없었던 탓인지 그는 비듬을 지고 외국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귀띔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내가 청년 시절에 어떤 목사님께서 바울에 관하여 설교하시는 가운데 종종 '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학을 배웠던 사람이었다 ' 고 하시기에 내가 쪽지 편지를 써서 남모르게 "목사님 혹시 '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다' 는 뜻 아닙니까?" 하고 지적을 해 준 일이 있었다.

그 목사님은 부흥강사로서 전국적으로 부흥 집회를 다니시는 분이셨는데
아마 그 후에는 그런 실수를 하시지 않으셨으리라 생각된다.
목사님 체면 지켜드리려고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 목사님은 가시는 곳마다 실수하셨을 것이고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얼마나 낙심 하였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지적은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자기네 목사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연말을 맞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데 담임 목사님께서 '송구영신예배 '를 자꾸 '송구영시예배'
라고 하시더라는 것이었다. (그 목사님께서는 0시에 드리는 예배니까 송구영시예배라고 이해하시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자기네 목사님을 '무식한 목사' 라고 듣는 내가 민망하도록 마구 흉을 보는 것을 봤다.


지금도 그 목사님께서는 연말이 되면 많은 교인들을 실망시킬 것이 아닌가 걱정이다.
목사님들께서도 완벽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연구하며 자신을 다듬는 자세로 목회를 해야 되는 줄 안다.

나는 지휘를 배우면서 커다란 거울 앞에서 혼자 비팅 연습을 하기도 하고, 옆으로 서서 허리가 앞으로 숙여지는지 보면서 자세를 바로잡는 연습을 하곤 했다.
합창 연주회에 참석하여 다른 사람들의 지휘 모습을 캠코더에 담아 와서 보기도 하고, 내가 지휘하는 모습도 찍어서 틀어 보기도 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또는 비디오에 나오는 나의 지휘 모습을 보면서 잘못된 자세를 고치곤 했다.

내가 지휘하는 모습을 사실 그대로 정확히 모니터 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나의 지휘자세를
필름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고 필름을 다시 보면서 스스로 다듬어 나가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합창연주회가 있어서 가보면 지휘자마다 개성 있는 지휘폼이 있다.
버릇이 되어 못 고치는 폼을 계속 지니고 있는 지휘자를 보곤 한다.

잘못을 지적해 주고 충고해 주고 함께 걱정해 주는 이가 옆에 있으면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그는 계속 다듬어질 것이며, 마침내 만족한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계속하도록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적극적으로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일 뿐 사실은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야간 신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낮에 힘든 일을 하고 간 터라 너무 피곤해서 그날 수업 시간에 졸았는데 가르치던
교수(신세원 목사님)님께서 얼마나 야단을 많이 치시는지 그날 수업 시간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고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만큼 자존심은 깍이고 내 코는 납작하게 되었으며 내 얼굴은 벌겋게 완전히

구겨지게 되었다.

"귀한 시간 내서 왔으면 잘 들어야지 졸기는 왜 해! 졸려면 집에서 자빠져 자지 왜 수업 방해를 하는 거야?"

메가톤급의 호통을 듣고 눈물이 찔끔 났던 그 사건 때문에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그 후로는 졸지 않았다.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야단치신 건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그때 그 사건이 내 인생에 잊지
못할 사건이 되었고 지금도 나는 신세원 목사님을 잊지 못한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가정교육이 잘 되어 어딜 가나 칭찬을 듣는다.
부모의 간섭으로 책망받을 만한 것들은 고치며 자랐기 때문에 밖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게 되는 것이다..
엄한 부모 덕분에 그만큼 다듬어졌다는 것이다.

한석봉과 그 어머니 이야기를 해 보자.
그의 어머니는 보고 싶은 자식이 오랜만에 집에 왔을 때 한없이 반가웠겠지만 자식을 위하여
보고 싶었던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불을 끄고 떡 쓰는 것과 글쓰기 시합을 하고서는 그 밤에 호통을 쳐서
도로 쫓아 보내어 마침내 천하의 명필가로 길렀다고 하질 않는가?

자식의 글솜씨를 다듬기 위하여 불을 끄고 누가 반듯한가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새겨 보아야 할 내용인 것이다.

 

요즘 신세대 부모들은 자녀의 ' 기 '를 살려주기 위해 도무지 야단을 치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에서 자식이 행여 선생님으로부터 야단을 맞기라도 하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은 자식의
잘못을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선생님께 찾아가서 항의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이들은 버릇도 없고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도 없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부족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들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만 낳아 기르니 어느 집이든 귀한 자식이 되어 호강하며 제 멋대로 자랐고
제대로 다듬어지질 않고 생긴 대로 컸으니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닌가 싶다.

따끔한 충고와 따뜻한 조언은 사람을 다듬어 나가는 대패와도 같다.
모난 부분은 깍아내고 울퉁불퉁한 부분을 고르게 하여 험상궂은 목재를 귀하게 쓰여지게
만드는 대패처럼 책망할 때 책망하고 칭찬할 때 칭찬하는 것이야말로 자녀를 참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다.

깎일 때의 아픔이 없을 수 없으나 더 아름다운 장래를 위하여 깎여져야 되겠고 다듬어져야 할 것이다.
다듬어지기를 거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나 다듬어지기를 마다하지 않는 자는 만인에게 사랑을 받으며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첨하는 친구를 사귀기보다는 솔직하게 충고를 아끼지 않는 친구를 가까이 하는 것이 좋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다.
젊은이들이여 잘못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친구에게 더 가까이 가기를 바란다.
잔소리하시는 엄한 부모님께 감사하기 바란다.

깎이는 아픔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다듬어지고 또 한가지 고쳐 나가면 그것이 곧 성장이요 크는 것이다.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사람은 평생을 다듬어지며 배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말자.
아픈 만큼 성장해 진다는 말도 잊지말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 잠언 23:13 >

20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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