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이의 죽음을 보고

2020. 9. 6. 22:21구, 홈페이지 자료

요 며칠, 방송이나 신문 지상, 인터넷에서는 이라크에서 피랍되었습니다.

살해된 한 젊은이의 죽음에 대해서 시끌벅적합니다.

그의 죽음이 우리 국민들, 나아가 전 세계인에게 준 안타까움은 적지 아니합니다.
이라크를 사랑해서 이라크어를 전공하여 이라크 선교사로 가는 것을 꿈꾸어 온 젊은이
고, 김*일 씨의 죽음은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토록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참수한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분노가 이라크 파병 반대로 또는
오히려 이라크 파병으로 표출되는 등 각개의 의견 또한 분분합니다.
기독교계에서도 한쪽에서는 고, 김*일 씨의 죽음을 순교로 보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그가
기독교인임이 창피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 직장예배를 드리면서 C 목사님께서 그의 죽음이 순교였다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그의 죽음이 떳떳하지 못했고 기독교인답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전도할 때 기독교의 차별성이 내세가 있음을 전하는 것인데,

내세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무소 부재하심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밖에 못 했느냐고 안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 겪어보질 않아 잘 모르지만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죽음 앞에서는 다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란 것을 이번 사건이 가르쳐

주었기에 이제 더욱 성령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순교의 선물, 위대한 죽음은 결코 사람의 희망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목도하게 된
이번 한 젊은이의 죽음을 보면서 계시록에 나오는 흰옷 입은 순교자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들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라크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겠다고 기도했던 젊은이였지만 막상 결정적인 순간, 마지막 순간에

나약해졌고, 살려달라고 울며 부르짖던 모습을 보여 준 데 대하여 한 편으로는 동정도 가지만 아쉬움도 남습니다.


욥을 두고 가슴 뿌듯했던 하나님, 사탄에게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와 같은 자가 없느니라..."

욥이 자랑스러웠던 하나님께서는 이번 김*일 씨의 죽음을 어떻게 보셨을까?

자랑스럽게 보셨을까?

부끄럽게 보셨을까?
왜 그는 살려 달라고 그토록 부르짖었을까? 
더 살아서 해야할 일이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 치하에서 순교하신 분들 이야기를 부흥회 등을 통해서 들었고 6,25 사변 때, 믿음을 지켰던 분들의

간증들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간증을 듣고는 힘이 났고 그분들처럼 나도 끝까지 믿음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 충만을 힘입지 않았을 때는 숨거나 도망가던 사람들이었으나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난 후에는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김선일 씨는 나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일는지 모릅니다. 

그의 가진 속 깊은 뜻을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일을 보면 사람이 죽음 앞에서 담대한 자가 되는 것은 성령 충만 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평소에 기도해야 되는 이유는 성령 충만함을 덧입고 위기의 때에, 결정적인 순간에 두려움

없는 죽음을 맞기 위함입니다.

풀무 불에 들어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의 의젓하고 당당함이 부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