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기세척기.....

2020. 9. 6. 22:08구, 홈페이지 자료

 

(이 글은 여동생 제갈 민 작가의 단편소설 입니다. 3회에 나누어 싣겠습니다.)


식기 세척기

1
여자는 나를 보더니 열어준 문 옆으로 슬쩍 물러선다. 나는 여자를 쳐다보 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끝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여자의 표정을 힐끔 훔쳐본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여자의 표정은 잔잔하면서도 청정한 기운이 뻗쳐있다. 오만함마저 느껴지는 그 잔잔함과 청정함이 짧은 순간 내게로 이입되어 나는 들어올 때 보다 더 차분해 진다. 나는 천천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발을 들여놓은 후 선체로 거실을 가만히 둘러본다. 거실 풍경은 한달 전과 다를 바 없다. 거실장도 그대로, 25인치 와이드 평면 텔레비전도 있던 자리에 그대로, 에어컨이며 내가 사다 놓은 잎이 예쁜 화분 두 개 까지 내가 놓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달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거실 전체에 흐르고 있다.
여자는 붙박이장처럼 문 옆에 붙어 서서 내가 거실을 찬찬히 둘러보고 갈색의 가죽소파에 앉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조용히 부엌으로 간다. 나는 비로소 그녀의 손에 끼워진 빨간 고무장갑을 본다.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나?
거실에서 돌아서 있는 부엌에 내 귀가 달려간다. 조용하다.

동서가 설거지하는 소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요란했다. 덤벙대는 성격 탓인지 손이 큰 탓인지 설거지하다 깨어지는 유리컵과 사기그릇이 꽤 되었다. 일주일에 서너 개 씩 깨어져나가는 유리컵이며 사기 그릇으로 인해 부부싸움이 꽤 잦았다. 아주버님은 그릇하나 컵 하나의 가격을 들먹이며 돈 잡아먹는 귀신이라고 동서를 몰아세웠고 동서는 그깟 것 몇 푼이나 한다고 남자가 쫀쫀하게 따지냐고 대들곤 했다. 부부싸움이 끝나면 동서는 감정을 주저앉히기도 전에 전화기를 붙들고 내게 보고를 했다. 또 싸웠어, 아이고 지겨워.
여자는 동서가 내는 소음의 절반도 안 내고 있다. 한번 씩 작은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지겨운 부부싸움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그리고 앞으로 깨어지길 기다리는 유리컵과 사기그릇들을 보존하기 위해, 동서와 나는 라디오 방송국에 이른봄부터 가을까지 스무 통의 편지를 보냈었다. 방송프로에서 주는 상품을 노리라는 라디오 방송 작가인 내 친구 p의 아이디어에 따른 것이었다. 동서와 내 유년, 그리고 현제의 삶까지 총 망라해서 써 보낸 스무 통의 편지 중 딱 한 통이 방송이 되었다. 아침 아 홉 시부터 열 한시까지 노래와 애청자들의 편지를 들려주는 그 프로의 엠시는 내가 보낸 편지를 읽고 난 후 이렇게 말했다. 이분은 추신을 적어주셨는데 이렇게 적으셨어요. 우리 형님은 손이 커서 그런지 그릇 깨먹는 게 일이랍니다. 형님을 위해 제발 식기세척기 하나 보내주세요, 그런데 어쩌죠? 식기 세척기는 한 달에 한 분만 드리는 월말 상품인데? 아무튼 피디와 의논해보겠습니다. 피디가 틀었는지 어쨌는지 딸랑 도서 상품권 10장만 왔다.

어!
여자가 부엌에서 나와 나를 보며 외마디 소릴 한다. 손에 커피 잔이 들려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만 끄덕이고 만다. 설탕은 한 스푼만, 하고 주문하고 싶지만 참는다.
아침에 남편은 대문까지 나갔다가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쳤다.

당신 꼭 가야해 알았지? 가서 형님소리 한번만 하라고. 안 그럼 어디 가서 재주껏 이천만원 빌려오던지.
일주일전 아주버님으로부터 '버릇없는 제수' 험담과 함께 빌려간 이천만원을 갚으라는 말을 듣고 난 직후부터 남편의 나를 보는 시선은 영 입에 들어간 떡 뺏어먹은 놈 보는 듯했다. 아주버님과 통화를 하고 난 직후엔 공연한 짓을 해서 안 갚아도 될 돈을 갚게 생겼다고 길길이 뛰기까지 했다. 그릇을 깨어먹든 둘이 싸우다 하나가 맞아 죽던, 구경만 하고 있었으면 이런 골치 아픈 일은 안 생겼지 않냐고.

화가 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주버님의 처사가 괘씸해서 다음날로 등기소에 달려가서 등기부등본을 한 통 때왔고 꺾기를 해서라도 이천만원을 대출해서 아주버님께 갖다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파트 말이지 일반 주택, 특히 오래된 한옥은 은행에서도 싫어했다. 이미 마을 금고에서 이천 받으셨네요? 이 집 갖고는 더 이상 대출이 안됩니다. 세입자도 두 가구나 있고....은행의 대출 담당자는 등기부등본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을금고에도 가보고 집 앞 신협에도 가보았지만 같은 소릴 했다.

돈 빌릴 곳이 없었다. 아까 집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이다 하고 p에게 전화를 했었다. 제법 큰 목돈을 은행에 넣어 놓고 있는 걸 자랑하길 좋아하는 p는 이천 소리를 꺼내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차라리 눈 딱 감고 그 여자한테 형님 소리 한번하고 말아. 대세를 따라야지. 안 그래? 나는 공연히 전화를 했다고 후회를 했다. 평소 때는 바늘과 실 같이 가까운 친구인데 돈이 개입되면 나완 아무 상관도 없는 십리 밖의 사람이라는 걸 또 한번 확인한 게 슬펐다.

이 아파트 입구에서 밑져야 본전이지 하는 마음으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여러 형제 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된장도 나눠 먹고, 김장 김치도 나눠 먹고, 등산도 같이 가는 동생이다. 며칠 전에 적금 천 오 백 만원을 탔다고 자랑을 했던 동생은 난감하다는 듯 조심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차라리 그 여자한테 형님 소리 한번하고 사정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이천이나 빌려서 언제 갚으려고 그래? 마을금고에서 융자받은 것도 아직 못 갚았지? 이자는 제대로 내?
그러고 보니 내 입을 열어 저 여자에게 형님소릴 하라고 한 사람이 셋이나 된다.

여자가 커피를 가져와 탁자 위에 놓는다. 나는 그녀를 살핀다. 하얀 얼굴, 뚜렷한 이목구비. 긴 목, 가는 허리. 그녀를 두르고 있는 연두색 홈드레스와 홈드레스 앞면을 가린 노란 앞치마. 여자는 커피를 내려놓고 부엌으로 간다. 홈드레스 자락이 출렁인다. 저 여자가 저렇게 키가 컸던가? 바닥을 끄는 홈드레스 탓인가 여자는 놀랄 만큼 늘씬해 보인다.

동서와 내가 우리 동네 시장 앞 횡단보도에 엎드려 있던 저 여자를 손가락질하며 웃었던 게 생각난다. 그 웃음은 지금도 횡단보도 어딘가에 떨어져 뒹굴고 있을 것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오직 이라고 할만큼 방송국에 편지 보내는데 시간을 쏟아 부은 결과가 너무 참담해서 기가 죽어 있는 우리에게 용기를 준 것도 역시 p였다. 그런 평이한 내용 갖고는 백날 보내봐야 도서상품권이야, 좀 드라마틱한 걸 보내봐. 예를 들면 혼자 계시는 시아버지를 며느리가 나서서 재혼을 시켜드렸다던가 하는. 재혼도 그냥 평범한 재혼 갖곤 안 되. 시아버지가 짝사랑하는 젊고 예쁜 여자가 있는데, 며느리들이 상사병이 걸려 다 죽게된 시아버지를 위해 그 젊은 여자를 찾아가 애걸복걸 사정하여서 마침내

그 여자가 지극한 효성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허락을 하고 말았다, 뭐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어? 동서에게 p의 말을 전하자 손뼉을 짝 치며 소리쳤다. 맞아! 우린 너무 순진했어, 있는 사실만 써야 한다는 법도 없는데.
식기세척기를 손에 쥔 듯 좋아하는 동서를 보니 삐죽 후회가 고개를 내 밀었다. 사실 그 스무통의 편지는 다 내가 쓴 것이었다. 동서는 필체나 문장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형편이 없었으므로 입으로만 썼을뿐이다. 나는 그 많은 편지를 쓰면서 혼자 있을 땐 공연한 짓을 시작했다고 투덜거렸고 동서가 있을 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썼다. 나를 그렇게 만든건 순전히 아주버님에게 빌린 돈 이천만원이었다. 우린 언제 갚을 지 알 수 없는 그 돈을 이자 한 푼 안주고 이년 째 쓰고 있었고 언제 내 놓으랄 지 몰라서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서가 내게 자기가 알아서 드라마틱하게 한 통 써줄래? 했을 때 난 활짝 웃으며 대답했었다. 걱정 마세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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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세척기 2

어떻게 그 때 내 머리 속으로 저 여자가 뛰어들어온 걸까?
시장을 가기 위해 횡단 보도를 건널라치면 여자는 엎드리고 있던 몸을 바닥에 쫙 붙이고 두 손을 높이 쳐들곤 했다. 가끔은 여자의 손바닥에 동전을 떨어뜨려 주고 싶은 때가 있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신문지 한 장 달랑 깔고 앉은 여자의 무릎이 얼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울 때. 그런 날은 집에 와서 까지 걱정을 해 주었다. 어디 몸을 녹이고 잘 곳은 있는지. 내가 여자를 편지의 주인공으로 삼은 날도 눈이 왔고 추웠다. 그날은 여자의 손에 천 원 짜리 한 장을 놓았다. 내 편지에서 여자는 누더기를 벗고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늙긴 했지만 서른 두 평의 아파트를 가진 남자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나는 편지의 말미에 그녀에겐 더 이상의 추위도 배고픔도 가난도 없다고 적었다.

내가 쓴 편지를 읽어보던 동서가 왜 하필 벙어리거지냐고 했을 때 난 뭐라고 했던가? 생각해보세요, 멀쩡한 젊은 여자가 노인네와 합쳤다는 걸 누가 믿어주겠어요? 방송국 작가나 피디가 바보가 아니에요. 하지만 벙어리에다 오갈 데 없는 거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요. 안 그래요? 나는 나의 주도면밀함을 자랑하고 싶었다. 내심으론 덤벙대고 덜렁거리는 형님이 나의 깊은 주도면밀함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냐고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른다.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담긴 편지는 방송국으로 달려간 지 딱 한달 후에 식기 세척기를 동서의 집에 갖다주었다. 동서는 다음날 사과를 씹어 먹으며 전화를 했다. 컵이나 그릇을 안 깨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게 뭔지 알아? 설거지하는 시간에 텔레비전을 본다는 거야 하하하. 나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치의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좋으시겠어요 형님.

그날의 기억처럼 커피 맛이 쓰다. 여자는 내 취향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단 한번 말해 줬을 뿐인데.
커피 잔을 들고 베란다에 깔린 햇살자락에 나가 선다.
이 십 층 아래, 차들이 줄지어 가는 게 보인다. 너무 높은 눈으로 보니 차들은 다 성냥갑만 하다. 내가 여자를 본 눈도 이러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눈을 낮출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아프게 가슴을 헤집는다. 내려다본다는 건 곧 바로 보 지 못한다는 소리다.
여자는 이제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베란다에선 부엌 안이 보이지 않는다.

동서는 지금 뭘 하고 있을 까?
나는 동서가 지나치게 놀라거나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걸 본 적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웃고 있는 것 같은 얼굴, 그것이 동서였다.
그날만은 예외로 쳐줘야겠다. 들러붙은 밥풀까지 깨끗하게 세척을 해 주고 마는 식기세척기의 성능을 칭찬하는 전화를 끊고 오 분도 안 되어 동서는 다시 전화를 했었다. 이번엔 말을 더듬고 있었다. 바, 방금 방송국에서 저, 전화가 왔어, 취재를 하러 나온대. 지난번 그 편지 말야. 식기세척기! 식기 세척기를 보내준 방송국에선 월간지를 만드는데 '며느리가 길거리에서 구걸이나 하는 벙어리 거지를 데려다 늙은 시아버지와 짝지어준 특별한 사연'이 방송국의

화제감으로 떠 올랐노라며 다음달 스폐셜기사로 싣는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동서는 거절을 했으나 그 쪽에서 반드시 해야 한다고, 이미 다 결정이 난 일이니 변경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더라고 했다. 식기세척기를 얻은 죄로 동서는 박힌 못을 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긴 누구라도 두 번 세 번 조르면 안 들어주고 못 베기는 동서였다. 무슨 말끝에 동서는 이렇게 소리쳤었다. 지금 내 입이 구, 굳어서 말이 안나와. 나는 동서의 큰 입이 석고처럼 굳어 고정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잠시 미소를 지었었다.

내가 감당이 안 되는 고민을 p에게 틀어놓았을 때 p는 태연히 말했었다. 취재 오기로 했으면 주인공을 데려다 놓고 기다리면 되지. 그게 뭔 고민거리냐는 p의 말은 동서와 내게 용기 백 배의 힘을 실어주었다. 우린 p의 말대로 벙어리 거지에게 일주일간의 따뜻한 휴가를 주기로 결정을 했다. 쓰레기란 쓰레기는 다 모아놓은 듯한 냄새를 풍기는 여자를 데려와서 목욕탕에 밀어 넣어 놓고 동서는 목욕탕 문에 기대어 낄낄 웃었다. 내 참 별일을 다 하네. 공 짜 좋아하다가 이게 뭐야.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아니겠냐고 말했던 것 같다.

목욕탕에서 나온 여자에게 동서가 입던 옷을 입히고 까치집 같던 머리를 단정하게 빗겨 뒤로 길게 묶어놓았을 땐 딴 사람 같았다. 동전 하나를 던져 줄 때마다 옷깃이라도 닿을까 조심했던 그 거지가 아니었다. 누더기 속에 저리 깨끗한 피부가 있었냐고 우린 감탄을 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니 성질만 더러워져서 물어뜯기도 잘하고 할퀴기도 잘 한다고 동네에 떠돌던 여자에 대한 소문은 다 거짓이었다. 여자는 온순했고 말귀가 통했다. 동서와 나는 여자의

귀가 아프도록 편지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또 했다. 여자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우리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자리보전하고 누운 지 오래되는 시아버님 방에 데려갔을 때 나는 여자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서리는걸 보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이었고 어찌 보면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서 흘리는 듯한 자괴감어린 미소같이 보였다. 나는 그 때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자들이 들이닥칠 날이 등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연습기간은 닷새였다. 그 닷새간 여자는 시아버님에게 밥을 먹이고 땀을 닦아주는 실습을 하였고 예, 이분 며느님이 잘 해 주시나요? 좋으세요? 등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연습을 하였다. 시아버님은 문제될게 없었다. 벌써부터 말문을 막고 먹는 입만 열어놓은 상태였으니까. 편지엔 아직은 건강하시다고 썼지만 일흔 넘긴지 오래된 노인이 언제 어느 때 갑자기 엎어져 말도 못하고 드러누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취재기자들도 동정은 할지언정 시빗거리로 삼을 일이 아닌 것이다.

남자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사건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나와 동서만의 비밀로 부쳐졌다. 여자는 동서의 친구로 되어있었다. 독신녀이고 몸이 아파서 잠시 쉬러 친구 집에 온 여자.
아주버님은 동서에게 당신친구 당신하곤 분위기가 다른데? 했다고 한다. 피부가 검고, 손이 크고, 목청도 크고, 허리마저 굵은 여자와 살던 남자는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가냘픈 여자가 조용조용 집안을 걸어 다니는 거나 그 맑은 동공으로 가만히 자기를 주시하는 거나 이따금씩 베란다에 나가 먼 하늘만 쳐다보는 것을 넋이 나간 듯해서 쳐다보고 있노라고 동서가 내게 귀띔을 해주며 낄낄거렸다. 내가 지금도 궁금한 건 그 두 사람이 일탈을 할 기미가 동서의 레이다망에 전혀 포착이 되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동서는 나의 의문에 답을 주지 않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취재기자들이 오기로 한 날 아침에.

안방이 궁금하다. 거실처럼 아무 변화가 없을까? 여자 모르게 들어가 볼 생각을 해 보 지만 어려울 것 같다. 여자는 말을 못 하는 대신 귀가 개처럼 밝다고 했다. 소파에 엎드려 자면서도 베란다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 눈치였다고 동서는 말했다. 내 발자국소리쯤 눈을 감고도 들을 것이다.
나는 빈 커피 잔을 들고 부엌문을 열었다.
식기 세척기 앞에 서서 허리를 구기고 투명 유리창을 통해 식기 세척기 안을 보고 있던 여자가 나를 쳐다본다. 식기 세척기 안에는 그릇들이 가득 차 있다. 그릇들이 지저분해 보이고 세척기가 돌아가지 않고 있는 걸로 보아 아마 돌리려고 하는 중인 게 틀림없다.
어느 때 보다 깨끗한 부엌이다. 냉장고도 윤이 반지르르 난다.

동서는 일년에 한번도 냉장고를 닦지 않았다. 부엌바닥은? 양말신고 들어오면 양말이 바닥에 달라붙었고 나중에 보면 양말 바닥이 새까맸다. 그래서 나는 실내화 없이 부엌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 변화가 없든 거실이 낯설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겠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살아오면서 죄지은 거라곤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뿐이어서 그런가, 여자의 동공은 맑다. 나는 맑은 동공을 보며 소리 없이 묻는다. 나한테 꼭 형님소릴 듣고 싶어?
이물질 같은 누런 것이 끼인 눈을 가진 동서는 그 눈에 속

내가 다 들어 있었다. 나는 웬 이자? 그냥 둬, 라는 소릴 들을 줄 빤히 알고 이자를 넉넉하게 봉투에 담아 내밀곤 했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맑은 여자의 눈은 그게 안 된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나는 커피 잔을 식탁 위에 소리나게 놓고 보란 듯이 안방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안방도 달라진 건 없다. 그러나 달라졌다. 늘 지저분해 보이던 침대 커버는 너무나 깨끗해져 있어서 예전의 앉기도 싫던 기분을 말끔히 없애버린다. 그 많던 먼지들이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속옷이 뒹굴고 머리카락이며 머리핀이 여기 저기 떨어져 있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책들이 흩어져 있던 방은 이제 없다. 문득 동

서가 돌아와도 앉을 자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동서는 너무 깔끔한 집엔 놀러가기조차 부담스럽다고 하지 않았는가. 동서가 우리 집에 놀러오면 나는 집이 쓰레기통이 될지라도 내버려 둬야했다. 치우지마, 나 가고 나면 치워, 그러면서 땅콩 껍질을 여기 떨어드리고 과자 부스러기를 저기 흘리곤 했다.
여자는 혹시나 동서가 돌아 올 것에 대비해서 동서가 앉을 자리를 미리 말끔히 지워내고 있는 건 아닐까?
문득 p의 말이 떠오른다. 대세를 따라야지 하던. 하지만 그럴 순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같이 들여놓은 저 여자에게 밀려난 동서에게 나는 절반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제까지 했던 것처럼 하자고 결정한다. 최소한 저 여자와 상면하는 일은 더 없어야한다고, 차라리 집을 팔자고 마음먹는다. 일억은 받을 것이었다. 그 돈으로 세입자들 전세금 내어주고 대출금을 갚고 나면 전셋집 하나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안보면 되는 것이다.

나는 거실로 나와 윤이 반지르르 나게 닦아 놓은 전화기를 들고 여자가 들을 만큼의 목소리로 말한다.
여보 아무래도 나 못하겠어. 형님을 배신 할 수가 없어. 우리 차라리 집 팝시다.
팔면? 우리가 언제 또 집을 살 수 있겠어?
남편은 화가 난 듯 그러나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여자가 걸레를 들고 나오더니 닦을 것 없는 거실 바닥을 닦기 시작한다. 여자가 내 쪽으로 걸레를 밀고 와서 나는 두 다리를 소파 위에 모두 올린다. 여자는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 간다. 먼지 하나라도 안 잡아내면 죽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동서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리려는 걸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탁자가 위로 휙 들렸다. 여자가 황급히 전화기를 향해 달려간다. 너 댓 번쯤 울어대야 겨우 뭉그적거리며 일어서는 동서와 썩 대조적인 모습이다. 나는 솟구치는 호기심을 눈에 가득 담아 여자를 본다. 궁금했었다. 무뚝뚝하기가 황소 같은 남자와 벙어리여자사
이에 어떤 대화법이 형성되었는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여자가 나를 힐끔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냉큼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수화기에 입을 대고 어, 어. 라고 뱉어낸다. 여자가 점점 활기찬 소리로 어, 어, 하는 거나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수화기를 톡톡 쳐대는 것을 볼 때 수화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목소리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아주버님일 것이다. 여자의 얼굴에 웃음이 이는 건 처음 보는 일이다. 누더기를 벗을 때도 못 보았던 웃음이다. 딱 한번, 내가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법을 가려쳐줄 때, 난 설탕을 한 스푼만 넣어먹어, 요즘 내 허리가 거의 드럼통이거든, 했을 때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통화가 길어진다. 여자의 입에선 쉴 새없이 무미건조한 그녀만의 언어가 실타래로 나온다. 도무지 매듭이 어디 있는지, 있기나 한 건지 감도 안 잡히는 실타래다. 아주버님은 저 실타래가 어디쯤 굽어드는지 펴지는지 매듭이 지는지 느낌으로 아는가? 그런 것 같다. 아니면 여자의 얼굴이 저리 밝을 수도 저리 긴 실타래를 뽑아 낼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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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세척기 3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생각한다.
식기세척기가 돌아가는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자는 식기 세척기를 사용 할 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세제도 들어 있지 않는데 예비 불이 들어와 있는 걸로 보아. 나는 나오면서 식기세척기를 작동시켜놓았다.

여자와 아주버님이 보름간의 밀월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난 동서 대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집을 그 만큼 오래 비워 놨으니 집 꼴이 어떻겠냐고 청소나 한번 해 달라는 동서의 부탁이 있었다. 아버님은 우리 집에 계시고 형님은 보따릴 사들고 친정에 가버렸다는 원망 서린 내 말쯤 귓등으로 듣고 대꾸도 없이 휑하니 안방으로 들어가는 아주버님의 등을 노려보던 나는 현관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뺨을 서너 차례 후려쳤다. 내가 동서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기껏 따귀 몇 대 때려주는 것뿐이란 걸 깨닳은건 잠시 후였다.
내가 여자를 때린 기척을 느낀 아주버님은 화난 얼굴로 안 방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여자의 손목을 끌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문 닫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했던지 민망할지경이었다.

여자의 뺨을 어찌나 호되게 때렸던지 손바닥은 집에 와서 까지 아팠다. 동서는 내가 손바닥을 비비고 있을 때 전화를 했다. 예삿일이 아니에요 형님, 나가라고 떠밀어도 안 나가고 때려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제 집인 듯 버티고 섰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내가 꼭 쫒아내고 말테니까. 나는 동서가 지피고 있을 희망의 불꽃을 꺼버리지 않기 위해 아주버님의 행실에 대해선 함구했었다. 그 때 말했어야 했을까? 형님 돌아올 기대는 이제 말아야 할것 같아요.

동서는 수시로 내게 전화를 걸어 묻고 있다. 어떻게 되었냐고, 그 여자와 아주버님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고...


집 앞에서 나는 대문을 열기 전에 잠시 담벼락을 둘러본다. 몇년전 사서 들어오던 날부터 조만 간에 더 큰집으로 옮겨야지 했는데 요 며칠 전부터 작아 보이지도, 초라해 보이지도 않는 내 집이다. 잃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가는 정, 정이란 게 참 묘하다.

현관문을 여는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혹시? 하는 생각에 수화기를 조심스레 귀에 댔다. 예감대로 마디 없는 실타래 같은 소리가 들린다. 어? 어, 어. 힐끔 쳐다본 벽시계가 막 오후 세시를 떨어뜨리고 있다. 아파트에서 나온 지 40여분 남짓 지났다. 아직 식기세척기는 돌아가고 있을 터이다.

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
어! 어?
내가 잠자코 있자 이번엔 툭툭 수화기를 쳐 댄다. 도무지 뭘 말하려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안다. 내가 식기세척기를 작동시켜 놓은 것을 화해의 신호로 판단하고 응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 어. 무슨 말을 할 까 망설이는 내 가슴에 동서의 눈물이 금을 그으며 떨어진다. 눈물은 동서의 투박한 손을 잡아 주어야한다는 연민의 정을 만든다. 여자는 계속 나를 부른다. 어, 어. 어. 툭툭. 그러다 나의 침묵이 불쾌한지 와락 화가 돋아나는 소릴 지른다. 어! 어! 나는 수화기를 내린다. 그리고 전화기 코드를 뽑고 휴대폰도 꺼 놓는다.


3
아버지는 새우를 잡았다. 새우잡이는 밤에 이루어진다.
물가의 가장 얕은 곳에 소쿠리모양을 한 그물을 놓아두면 새우들이 떡밥 냄새를 맡고 그물 속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어린 아이 주먹보다 작은 스티로폼 조각을 그물에 달아 놓아 어둠 속에서도 그물의 위치를 잘 파악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긴 막대 끝에 달린 v자의 쇳조각으로 스티로폼을

건져 올리면 파다닥, 어둠을 깨고 수면을 깨고 잠에 기웃거리는 내 정신을 깨며 새우들이 그물과 함께 물 밖으로 올라왔다. 열 살이었을까? 겨울 방학 때 아버지를 따라 새벽이 여무는 호수를 돈 적이 있다. 손전등으로 호수 가장자리를 비추며 그물을 연결하고 있는 하얀 스티로폼 조각을 찾아 고리로 걸어 올리려던 아버지가 소리쳤다. 저게 뭐지? 가장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얀 옷자락 같은 게 떠 있었다. 아버지는 잠시 손전등으로 비춰보다가 반쯤 내려 접었던 장화

를 펴서 허벅지까지 올린 후 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잡아 끌어냈다. 그 물체가 물 밖으로 다 나오기도 전에 아버지는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야. 저기 가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오너라. 그리고 넌 저 멀리 가 있으라고 하셨다. 나는 멀리서 밤낚시를 하고 있던 남자들 둘을 아버지께 보내고 남자들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마냥 기다렸다. 죽은 사람은 여자일까 남자일까 궁금해하면서. 한 참 후 낚시꾼들이 돌아오며 쑤군거렸다. 공연히 경찰에 신고해봐야 오라 가라 귀찮기만 하지 뭐. 모

르는 척 하는 게 상수야. 건져 준다고 다시 살아날 것도 아니잖아? 내가 아버지 있는 데로 갔을 때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물을 들어올리고 있었고 새우들은 파다닥 소리를 내며 올라왔다. 처음 있던 그곳에서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휜 옷자락을 바라보는 내 귀에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있던 자리에 놔두는 게 좋겠다.
그 일 이후 어린 내 잠엔 날마다 꿈이 달라붙었고 그 꿈엔 새벽의 호수가 나타났다. 소복한 물귀신이 물을 박차고 뛰어나오거나 시체를 끄집어내는 아버지가 있는 호수였다. 여자의 전화를 끊고 잠시 이불 속에 들어간 사이 잠이 찾아왔고 잠 속에 사춘기를 지나면서 단절된 그 세계가 찾아들었다. 아버지는 죽은 여자를 끌어내기 위해 물 속으로 들어가고 계셨다. 물위에 떠오른 희뿌연 옷자락이 너무나 선명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버지와 몇 발작 떨어진 곳에

서서 소리치고 있었다. 아버지, 관두세요. 놔 두시라고요, 아버진 나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나는 악을 써대고 있었다. 그만 두세요, 꺼내 놔 봐야 귀찮은 일만 생겨요! 그냥 두면 다 편할 것을. 그러다 문득 내가 열 살의 어린 소녀가 아니라 서른 한 살의 여자라는 걸 깨달았다. 꿈이구나! 싶었다. 꿈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한사코 아버지를 말리고 있었다. 내 눈을 띄운 건 초인종 소리였다.
얼마나 잠이 깊이 들었으면 그렇게 눌러대도 못 들어? 아파?

p의 손엔 빵꾸러미가 들려있고 내게 환한 웃음을 보이지만 몇 시간 전에 느꼈던 십리 밖의 느낌을 지워내진 못한다.
그 년한테 형님이라고 했구나?
내가 대꾸가 없자 p는 지레짐작을 하고 중얼거린다. 거지 년이 출세했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 한잔을 건네주며 중얼거린다. 누구나 우리처럼 이중구조를 가지고 살고 있는 걸까? p는 무슨? 하고 궁금해하는 눈빛이 된다. p는

내 얼굴을, 나는 내 안에 있는 다른 나를 본다. 내가 한 발만 내어놓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고 있는 사이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세워놓은 이정표가 보인다. 나는 가끔, 아니 종종 내 안에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 안의 나는 나보다 훨씬 영악하고 치밀하고 계산이 빠르다.
p가 턱 끝으로 빼놓은 전화 코드를 가리키며 묻는다.
누구 전화를 안 받으려고?

그 여자.
그 여자? 말도 못하잖아.
해. 알아들을 순 없지만.
p가 웃는다.
그래? 난 니가 니 동서 전화를 안 받으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칭찬 해주려고 그랬지. 이젠 니 동서는 죽은 사람이야, 안 그래?
커피보다 쓴 p의 말에 내 미간이 찌푸려진다. 넌 조금도 책임감을 안 느끼니? 동서가 그렇게 된 데는 니 책임도 있지 않나? p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심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의 모든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거야. 넌 정말 모르겠니? 니 아주버님에게 이미 니 동서는 폐기 처분 값에 이르렀던 거야.
동서가 아이를 못 낳고 그릇을 잘 깨뜨려서 부부싸움이 잦긴 했지만 폐기 처분 감이었다 곤 믿어지지 않는다. 십 수년을 마주보고 살아온 부부가 아닌가. 그러나 p의 말은 내 가슴을 짓누르는 부채 감을 씻어낸다. 어쩌면 p도 스스로의 말로 보호 망을 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약간 화난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내 눈을 마주보는 p의 눈빛이 불안하고 공허해 보인다. p는 이번 사건이 널리 알려지거나 헤쳐 보여 지기를 원치 않을 뿐 아니라 빨리 깊은 물 속으로 가라 안기를 바랄 것이다.

저녁 장을 보기 위해 시장을 가는 내 발걸음이 횡단보도 앞에서 멈춘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붕어빵을 파는 옹색한 푸른색의 포장마차와, 다 팔아야 만원도 안 될 것 같은 푸성귀를 앞에 놓고 있는 할머니들과, 삼 천 원 이란 쪽지를 단 소쿠리에 껍질이 두터워 보이는 밀감을 가득 담아놓고 사과 궤짝에 앉아 졸고 있는 남자가 연출하는 풍경은 어찌 하루도 안 바뀌는지. 저들은 자신들의 옆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아침부터 해질녁까지 엎드려 있던 벙어리거

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나는 푸른 포장마차로 들어가 손가락으로 여자가 엎드려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빵 틀에 밀가루 반죽을 붓고 있는 할머니에게 묻는다.
저기 있던 거지 어디 갔는지 아세요?
글쎄요?
할머니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잇는다.

십 년을 하루 같이 있더니 안 보인지 한달 됐에요. 안 그래도 시장사람들이 다 궁금해 했에요. 요즘은 지하도 같은데도 거지들이 발을 못 붙이게 해서 한데 잠을 자다가 얼어죽었을지도 모르지. 지난달엔 얼마나 추웠에요. 인신매매 범한테 잡혀갔다는 소문도 있긴 하더라만, 말도 못하는 여자를 데려다 뭐에 쓸라고 그랬겠에요. 죽었지 뭐.

종이 봉지에 든 붕어빵의 따뜻한 감촉을 느끼며 사람들 틈에 끼어 횡단보도를 건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아주버님이다. 식기세척기를 돌려놓고 가셨어요 제수씨? 잠깐만 기다려봐요, 집사람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겠다는데. 아주버님의 음성은 썩 밝다. 금새 어. 어, 어, 하는 굴곡 없는 특이 언어가 귀에 들어온다. 신기하게도 세척기 돌려줘서 고마워요, 하는 느낌이 온다. 하자고 하면 못 할 게 없다더니 듣자고 마음먹으니 들린다. 뭘요, 형님. 커피 잘 먹고 왔어요, 말하는 내 눈에 계집아이의 눈물이 들어온다. 투박하게 생긴 젊은 엄마의 손에 잡혀 마주 건너오는 계집아이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거의 통곡을 하며 나를 스치고 내

발목을 횡단보도 한 가운데에 묶어둔다. 계집아이의 등을 한참 쳐다보고 있던 나는 나보다 훨씬 강하고 민첩하고 계산이 빠른, 그래서 대부분 나를 이기고 마는 내 안의 나에게 묻는다. 형님도 저렇게 울고 있을 텐데?


(2003,문예사조 신인상)

 

제갈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