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때 교회 봉사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

2008. 11. 25. 08:55칼럼

--- 청년의 때 교회 봉사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 ---

저는 가난한 집안의 5남매 맏이로 자라 열여덟 살 때인 1967년 1월29일 이종철 집사님의
전도를 받고 우리 가정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일가 친척이 많지 않아서 외로웠던 저는 교회에 가면 성도들과 친형제처럼 지낼 수 있다는 말에 욕심이 생겨 교회에 다니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 다닌 교회는 집 가까운 비산장로 교회였습니다.
설교말씀과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주일학교 반사로 봉사도 하였으며 새벽기도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비산교회에 약 1년을 다녔을 무렵 중앙침례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석하고 큰 은혜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중앙침례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중앙침례교회는 부흥강사로 전국을 다니시던 김충기 목사님께서 시무하고 계셨습니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거리가 멀었으나 수요일 예배도 꼭 참석하였으며 교회에서 맡은 일을 성실히 감당해 나갔습니다.
토요일 저녁이면 교회에 가서 청년들과 교회 일에 관해서 의논도 하고 혼자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다가 주일 하루 온 종일을 교회에서 보내고 월요일 아침 일찍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할이 내겐 전혀 힘들지 않았고 당연한 일과가 되어 갔습니다.

교회에 머무는 시간이 많음에 따라 저는 목사님과 만나는 시간이 다른 사람보다 많았고
목사님께서도 저를 신뢰하시고 여러 일들을 맡기셨습니다.
많이 못 배우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였지만, 목사님께서는 미국에 집회 가셨을 때도
저에게 그림 엽서를 보내 주셨을 만큼 유달리 사랑해 주셨습니다.
저는 ' 목사님은 하나님의 대리자 ' 라는 생각에서 목사님을 받들고 순종하였으며 ,
목사님 편에서 일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군을 제대하고 결혼을 하면서 화장품 대리점을 경영하던 중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이자 돈을 과다하게 쓰며 확장을 하던 우리 사업은 화장품 유통구조의 변혁기
(외무사원을 통한 방문판매에서 할인점 형태의 소매점 유통으로 바뀜) 를 맞아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1983년 9월15일 쥬리아 화장품 회사의 압류집행으로 우리 집에는 가재도구마다 붉은 딱지가 붙었으며 외무사원들의 채권까지도 추심을 당하고 말아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우리부부는 지방으로 장사를 나서야 했습니다.
2..5톤 탑차 (냉동차처럼 생긴 것)에 화장품을 싣고 다니면서 화장품 소매점에 상품을 공급했습니다.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차 뒤쪽 짐칸에서 잠을 청하며 차 속에서 밥을 해 먹고
경주, 포항, 울산, 마산, 진주 등지를 다녔습니다.

내게 주님이 없었다면 그 힘든 시기를 꿋꿋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비록 사업은 실패를 했지만 인생마저 실패할 수는 없다고 굳게 다짐하며 살던 동네를
떠나지 않고 버텼으며 교회생활과 아이들 교육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저를 보는 주변의 시선이 예전과는 판이하게 따가웠고 온갖 빚쟁이들에게 시달림을 당하였지만 그럴수록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저의 사업 실패로 실추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려야한다는 일념으로 빚을 갚으며 살았습니다.

저는 사업 실패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저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물질적으로 풍족한 장로가 되어 교회에 봉사하리라든 제 나름대로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봉사는 결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내는 다시 조그마한 화장품 가게를 시작했고 저는 유통업을 하는 개인회사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들의 건강을 지켜주셨고 적당한 물질도 채워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선물인 아이들이 믿음생활 잘하고 공부를 잘 해 주어서 내 입술에선 감사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큰 아이 믿음이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2학년에 재학중이며 토요일이면 찬양단 연습과 청년회 일로 봉사하다가 늦게 서야 집에 돌아오곤 합니다.

둘째 아이 소망이도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재능을 받아서 서울예고에서 피아노를 전공 중이며 이번 서울대 기악과 수시입학 시험에 합격을 하였고 다니던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아
본 성가대 반주자로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젊은 때를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그 어떤 투자보다도 확실한 투자라고
체험하고 있기에 저는 아이들이 교회에서 늦게까지 봉사하는 것을 말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요긴하게 잘 쓰여 질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주의 종을 잘 섬겨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고 , 주의 종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잘 되기를 간구하는 대상이 되기를 아이들에게 기대할 뿐입니다.

어느덧 일생일대의 시련이 끝나고 이제는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하게 됐으며 교회의 성도들과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 가정을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족을 따갑게 보는 시선은 사라졌습니다.

저의 젊은 날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 때의 적은 봉사를 크게 갚아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

2001 ,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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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제갈 집사님

제가 국민일보를 구독하는 이유는
광고란에 기독교의 좋은 세미나나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눈이 위쪽 보다 아래쪽을 일단
훓더내려가는데 !

새해 신앙계 1월호의 광고에 그 많은 내용을 다 보기란
어려운데 어디서 많이 보았던 한 분의 사진이 거기에 ? & !

제가 신앙계 1월호를 보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이런 곳에 나올 수 있는 위인이다라고 아내에게
설명을 하자 집사람도 한 수 더 떠서 대명교회 때부터
오늘까지 곁눈질 없이 오직 충성하는 자리를 지켰다고
그러면서....

정말 축하하고 축복합니다 !
요즘 집사님 생애에 클라이막스가 아닌가 할 정도로
주 안에서 만사형통하는 명장면을 옆에서 보게 됩니다.

다만 집사님을 사랑하는 맘으로 아래 내용을 권면합니다.

새해에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많이 애쓰십시오.
아마 그렇게 하고 계시겠지만
저희 교회에 최집사님이 어느 한 순간 갑자기 건강이
정지되는 장면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 곳이 길면 다른 한 곳이 짧은데
그 짧은 곳이 건강 문제가 아니길 빌면서.....

송구영신 !

늘 사랑해주셔서 감사하옵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자라야 할 건데.

샬롬.

 

-   조선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