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일장로 회고록(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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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을 향하여[9]
본향을 향하여[9] 나는 그들과 함께 지서로 갔다. 지서 앞에선 상리의 여러 청년들이 지나가는 보병전투부대를 열심히 환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엄중히 주의를 주었다. "여러 동지들, 앞으로 어떠한 일이 우리 앞에 있을지 모르나 우리고장에서는 불미한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잘해 봅시다. 한사람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중해서 한 건의 불상사도 없도록 처신합시다.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다 함께 노력합시다." 모두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합시다. 정빈 동지의 뜻을 따라 우리고장을 우리가 사수합시다." "그러면 우선 일 할 수 있는 조직체를 잠정적으로나마 구성하여 봅시다. 우선 명칭부터 정하지요." 강선봉이 자위대라고 하자는 의견을 내 놓았지만 ..
2008.12.24 -
본향을 향하여 [8] -6.25 전쟁의 비극 편-
본향을 향하여 [8] 6.25.전쟁의 비극 일천구백오십년 사월중순경 서울의 숙부님으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갈이 왔다. 서울에서 같이 장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 때 숙부님은 운혁 아저씨, 박성복, 표광열과 함께 멸치 도매업을 하고 있었다. 학교를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장규익 목사님도 동의하셨고 아버지도 동의를 하셔서 숙부님의 뜻에 따랐다. 멸치도매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청, 원산 등지에서 월남한 여인들이 우리에게서 멸치를 도매로 사다가 방산 시장부터 종로사가 네거리에 이르는 길에 서서 소매를 하는데 한줌이라도 더 팔려고 아우성을 치며 몸싸움까지 벌였다. 대부분 혼자 벌어 오륙 명의 가족들이 먹고사는 경우였다. 나는 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한줌씩 더 넣어주곤 하였다. 그러자 여인들이 내게..
2008.12.24 -
본향을 향하여[7]
본향을 향하여[7] 계몽운동 1948년 7월 첫 주일에 문호 교회에서 봉안, 용진, 양수, 삼봉, 문호, 정배 여섯 교회 청년들이 모여 기독청년 연합회 모임을 가졌다. 이날 우리는 지역 농촌을 복음화하고 계몽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사업 내용은 이러하다. 첫째 8월 첫 주일 오후에 문호교회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농촌계몽운동을 주제로 하는 웅변대회를 개최하기로 한다. 둘째 성탄절에 연합으로 노래 율동 성극등으로 성탄축하회를 갖도록 한다. 웅변대회엔 내가 봉안교회 대표로 출연하였다. 나는 한국농촌의 청년들이 너무도 무기력하고 꿈이 없는 것을 지적하고 우리 농촌청년들도 개척정신으로 비전을 가지고 깨어나 한 알의 밀알이 되자고 청중을 향하여 부르짖었다. 이제 우리농촌청년들이 뒷짐만을 지고 서..
2008.12.24 -
본향을 향하여[6]
본향을 향하여[6] 할머니는 나를 껴안고 한없이 흐느껴 우셨다. 나도 감정이 복받쳐 울고 말았다. 내 얼굴은 멍으로 얼룩이 져 있었고 제대로 앉을 수 없을 만치 온 몸이 아팠다. 테러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그 날 밤 할머니와 함께 꿇어앉아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 개월 동안 건국 청년 운동을 한답시고 한번도 교회를 나가지 못했던 것을 회계하고 이제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 날 이후 집에서 가까운 개척교회에 열심히 나갔다. 숙부님의 옥고 해방된 지 일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건국은 요원한 체 정치 테러가 난무하였다. 몽양 선생은 극 좌우로부터의 표적 인물이었다. 날마다 쫓김을 당하던 몽양 선생이 우리 집에..
2008.12.24 -
본향을 향하여[5]
본향을 향하여[5] 해방후의 서울거리는 테러, 정치 싸움으로 얼룩이 졌다. 이름 모를 국호와 정강정책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각양각색 삐라가 거리를 어지럽혔고 각종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한심한 한편 착잡하였다. 이것이 그리던 조국의 해방인가? 한숨만 나왔다. 나는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해방된 조국이 나아갈 길을 인도하소서....... 1945년 8월16일, 중앙에 건국치안대가 조직되어 장 권 씨가 책임자가 되었다. 학생 2000여명이 전 시내에 넓게 퍼져 치안을 맡았다. 치안본부는 안국동에 있는 풍문여고 교사를 임시로 사용하였다. 숙부님 지도 하에 있던 청년동지들 삼사십 명은 휘경동에 있는 태창직물공장 기숙사에 터를 잡고 건국청년운동을 하였다. 몽양 선생도 수시로 들렸..
2008.12.24 -
본향을 향하여[4]
본향을 향하여[4] 공한지에는 어디고 땅 한 평 남기지 않고 피마자를 심어서 기름을 짜 생산하여 출하해야했고 큰 소나무 뿌리를 태워 뿌리에서 기름을 짜내는 송탄유도 만들어내야 했다. 송탄유는 오래된 노송에서만 생산되므로 노송이 별로 없는 우리 마을은 책임량을 다 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 피마자유나 송탄유로 비행기나 기타 군수 기계류의 기름으로 쓴다니 참으로 한심한 정책이었다. 노송이 없다는 구실로 송탄유 생산을 거부 하다보니 관청으로부터 탄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마을 전체가 요주의 마을로 감시를 받았다. 어느 날 긴 일본군도를 찬 일인순사가 조안 지서 주임과 와부면 사무소직원 너댓 명과 함께 우리 집 대문 안으로 불쑥 들어와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이 마을에는 어찌된 일인지 공출 한 가마..
2008.12.24